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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철종은 편견... 농민을 더 걱정하고 고민한 왕"

[인터뷰] <철종의 눈물을 씻다> 저자 이경수

등록 2023.06.04 19:56수정 2023.06.12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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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생활하다 보면 지역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벌이는 작가를 종종 만나게 된다. 지난 5월 중순 <철종의 눈물을 씻다>를 펴낸 이경수 작가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강화가 고향인 이 작가는 이 책 외에도 13권의 역사서를 출간했다. <강화도 근대를 품다>, <연산 광해 강화>처럼 '강화'를 주제로 한 책이 대다수다. 이번에 출간한 <철종의 눈물을 씻다>도 부제 '강화도령 이원범의 삶과 그의 시대사'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강화와 연관성이 많은 책이다.


이 작가에게 전화해서 인터뷰 장소를 강화 읍내 고려궁지 아래쪽 용흥궁으로 잡았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용흥궁이야말로 기사에 들어갈 사진을 찍기에도 최적의 장소였다. 용흥궁으로 가는 길에 생각해보았다. '철종의 눈물을 씻다'라는 제목엔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일까.

철종 유배지 용흥궁에서 만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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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강화도령’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이경수 작가는 30여 년 만에 진짜 ‘강화도령’ 철종에 관한 책을 썼다. ⓒ 최진섭


용흥궁은 강화도령 이원범이 귀양 생활하던 초가집을 철종(1831~1864)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해(1853년)에 기와집으로 개축한 건물이다. 철종은 강화에서 유배 생활하던 이 집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의 조부 이인에 이어 부친 이광까지 무려 37년간이나 강화에서 귀양살이했기에 더욱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비가 와서 그런지 용흥궁에는 관람객이 보이지 않았고, 먼저 도착한 이 작가가 툇마루에 홀로 앉아 있었다. 저서에 소개된 필자 약력을 통해 고향이 강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몇 가지 더 물어보았다.

- 강화가 고향이라고 들었는데, 태어난 동네가 어디인가요?
"네, 고려궁지 바로 밑의 궁골(강화읍 관청리)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났어요. 강화초, 강화중, 강화고를 졸업했고요. 적어도 증조부 때부터 집안 대대로 강화에 살았죠."

- 어쩌면 궁골에 사시던 증조부나 고조부께서 용흥궁 주변을 지나치거나 강화도령을 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겠죠."


- 고려궁지가 작가님의 어릴 적 놀이터였나요?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고려궁지 안의 명위헌(동헌) 건물을 강화군립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죠. 가끔 도서관 가서 책을 보기도 했지만 집 앞에 있던 만화방에 더 자주 갔고요."

- 이곳 용흥궁에도 자주 왔습니까?
"그 시절엔 용흥궁이 유적지가 아니고 민간인 살림집으로 사용됐어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집주인 이해승 후작이 세를 주면서 집 꼴이 엉망이 됐는데, 그때부터 궁의 위엄은 사라졌어요."

생가 바로 위아래에 고려궁지와 용흥궁을 끼고 살던 이 작가는 사범대로 진학해서 역사 교사가 되었고, 1989년 경남 마산중앙고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다. 학생들은 강화가 고향인 역사 교사에게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1993년 김포 양곡고로 옮겼으며 2017년 명예 퇴직할 때까지 이곳에서 역사 교사로 근무했다.

교사로 일할 때 강화 역사 개설서인 <강화도史>를 냈고, 명예퇴직 후에는 더 활발한 저술 활동을 벌이고 있다. <연산 광해 강화>, <오군, 오군, 사아이거호 – 강화도에서 보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가> 등은 명퇴 후에 낸 책이다. 이 중에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가>(푸른역사, 2014)는 5쇄를 찍은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이 작가는 저술 외에도 김포문화원이나 강화문화원, 강화노인복지회관 등에서 역사 강의를 꾸준히 하고 있다.

용흥궁에서는 작가의 인물 사진만 찍고 주변의 조용한 카페로 이동해서 이야기를 나누려 했으나, 한적한 용흥궁에서 철종을 주제로 인터뷰 하는 것이 더 좋겠다 싶어서 툇마루에 눌러앉았다.

드라마, 영화의 강화도령 이미지는 완전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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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수 작가는 <철종의 눈물을 씻다>가 나온 뒤 책을 듣고 고양시 덕양구의 서삼릉에 있는 철종 묘를 찾아가서 술을 따랐다.. ⓒ 최진섭

 
- 제목이 '철종의 눈물을 씻다'인데, 철종의 눈물은 뭘 말하는 건가요?
"철종의 실체에 관한 오해,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 어떤 오해, 어떤 억울함이죠?
"철종 하면 사람들은 나무꾼, 농사꾼, 무능, 무식, 무기력, 주색잡기 등을 떠올리는데, 어떤 사료적 근거도 없는 평판이죠. 완전 허구예요."

- 어쩌다 그런 세평이 널리 퍼진 걸까요?
"드라마나 영화 때문이죠. 픽션과 팩트, 스토리텔링과 역사적 사실을 구별하지 않은 데서 온 현상입니다."

흔히 철종 하면 떠오르는 말은 첫사랑, 나무꾼, 무식한 왕 등이 아닐까 싶다. 대중이 이런 선입견을 품게 된 결정적 이유는 1960년대에 히트 친 영화 <강화도령>(1963)과 1970년대의 드라마 <임금님의 첫사랑>(1975)과 같은 영상물 때문이라고 한다. 이 작가는 픽션과 역사적 사실의 경계에 혼란을 가져오는 일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강화나들길 14길이 '강화도령 첫사랑 길입니다. 용흥궁에서 –찬우물약수터 –철종외가를 잇는 11.7킬로미터의 길이죠. 영화 <강화도령>에서도 이 약수터가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스토리텔링이에요. 스토리텔링으로 꾸며낸 이야기가 역사인 척 말해지고 그게 사실인 것으로 기록되고 홍보되는 건 문제죠. 물론 스토리텔링은 잘 활용해야죠. 그렇지만 이것이 실제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히 밝혀줘야 합니다."

일자무식은 터무니없는 억측

강화도령 하면 '일자무식', '나무꾼'이라는 편견도 있다. 이는 실제와 얼마나 부합하는 말일까. 이 작가는 철종이 강화도령 시절 나무꾼으로 일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부가 깊지는 않았을지라도 일자무식이라는 건 터무니없는 억측이며 사료를 통해 보건대 유배 시절에도 기본적인 한학은 익힌 것으로 나온다.

이에 관해 이 작가는 <철종의 눈물을 씻다>에서 '강화도령'을 한양으로 모시고 온 정원용(1783~1873)이 철종의 즉위식이 끝난 직후 "독서의 다소는 과연 어떠하셨는지요?"라고 묻자, "일찍이 <통감> 두 권과 <소학> 1, 2권을 읽었으나 근년에는 읽은 것이 없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철종이 즉위 초기에는 공부가 달려 힘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철종의 눈물을 씻다>에는 "철종이 즉위한 첫해에는 글의 뜻을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정원용이 어려운 한자를 우리말로 풀어서 다시 설명해줘야 쉽게 이해하곤 했죠"라는 대목도 나온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자 않아 정사를 펼치는 데 문제없을 정도로 진도를 나간다. 1849년(철종 즉위년) 경연에서 <소학>을 한 것을 시작으로, 1850년 <사략>, <통감>, <대학>을 떼고, 1851년에 <맹자>를 끝낸다. 1853년에 <시전>, 1854년에 <서전>, <송사>, <원사> 등을 읽었다.   

백성을 사랑한 철종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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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은 강화도령이 귀양 생활하던 초가집을 철종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해인 1853년 기와집으로 개축한 건물이다. 강화도령은 이 집에서 14세~19세까지 5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 최진섭

 
철종에 대한 혹평은 세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 교과서 속에서도 조선 시대 가장 무능한 왕으로 철종을 꼽았다. 철종 시기는 안동김씨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진 시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철종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쉽게 눈에 띈다.

<철종실록> 13년(1862년) 3월 10일 자엔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철종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게 된 백성들이 탄식과 원망 끝에 일어난 것이다. 그들이 하고 싶어 그랬겠는가. 이렇게 된 것은 우선 내가 부덕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고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고, 신료들이 백성을 잘 보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럽기만 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적혀 있다.

<철종의 눈물을 씻다>에는 철종의 통치 철학을 넘겨 짚어볼 수 있는 글이 여러 대목 나온다. <철종실록>이나 다른 사료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 철종은 '思無邪(사무사)'라는 세 글자를 직접 써서 희정당에 걸어두고 늘 마음에 새겼다. 생각함에 삿된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본문 188쪽)

- 탐관오리의 해로움은 홍수, 맹수보다 심하다. 그들이 백성을 수탈하여 파산시키면서 자신을 살찌우는 게 지금 세상 풍조이다. 호소할 곳조차 없는 우리 백성들이 결국은 굶어 죽어 구렁을 메우는데도 구휼하지 않으니 이게 나라인가.(본문 316쪽)
 
철종은 "방백과 수령 가운데 탐오함이 가장 극심한 자는 침실의 벽에 다 써 놓았"을 정도로 백성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를 척결하려는 의지가 높았다. 이처럼 철종실록이나 사료를 보면 철종의 애민정신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점에 관해 이 작가에게 물어보았다.

- 철종은 탐관오리를 없애기 위해 나름 고심을 한 것 같은데요.
"철종은 탐관오리를 색출해서 처벌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암행어사 파견도 다른 왕들에 비해 자주 했어요. 그러나 당시 삼정의 문란은 부패한 권력 구조 속에서 근본적인 해결을 기대하기 어려웠죠."

-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철종을 가르칠 때 장점이나 업적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없나요?
"거의 없어요. 보통 철종 시기를 거치면서 조선이 망국으로 기울었다고 가르치죠. 개인적으로는 영조, 정조 시기의 붕당정치에 비해 세도정치시기를 더 나쁘게 묘사한 점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해봅니다. 다른 임금들의 관심이 주로 양반 사대부에게 있었다면 철종은 농민의 삶을 더 걱정하고 고민했습니다."

이 작가는 <철종실록> 등의 사료를 읽어 본 뒤 철종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음에 깊이 공감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철종의 눈물을 씻다>에는 다른 임금들과 달리 백성들의 일상을 접했던 철종이 "그들의 곤궁함을,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실제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 초부터 마지막까지 백성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았다"라고 자신 있게 썼다. 책 제목처럼 철종의 눈물을 조금이라도 씻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지닌 저자의 철종에 대한 따뜻한 눈길이 느껴졌다.

책을 들고 찾아간 서삼릉의 철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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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철종왕릉 예릉 전경. 강화도령으로 지내다 19세에 왕이 된 철종은 14년 간 통치하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이경수

 
이경수 작가는 <철종의 눈물을 씻다>가 나온 뒤 책을 들고 고양시 덕양구의 서삼릉에 있는 철종 묘를 찾아갔다고 한다.

"술 한 잔 따르며 말했어요. 당신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려 책을 썼습니다.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한 당신의 진짜 모습이 전달되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20대 교사 시절에 '강화도령'이란 별명을 가졌던 이 작가는 30여 년 만에 진짜 '강화도령' 철종에 관한 책을 썼다. 앞으로의 저술 계획이 궁금하다. 그의 다음 관심사 역시 강화도였다.

"아직은 구상 단계이지만 '강화도의 관방사'를 정리하고 싶어요. 강화의 산성, 진, 보, 돈대 등을 망라한 국방사를 역사적 배경과 함께 엮어볼까 합니다."  
덧붙이는 글 <강화뉴스>에도 기고합니다.

철종의 눈물을 씻다 - 강화도령 이원범의 삶과 그의 시대사

이경수 (지은이),
디자인센터 산, 2023


#이경수 #철종 #강화도령 #용흥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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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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