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개월간 저를 심적으로 돌봐주시고, 기꺼이 모든 정신적 지지기반이 되어주신 나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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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선생님께.
선생님, 초롱입니다. 벌써 보고 싶어요. 노트북을 열고 키보드 위에 손을 대자마자 벌써 눈물이 차올라요. 지난 6개월간 저를 심적으로 돌봐주시고, 기꺼이 모든 정신적 지지기반이 되어주신 나의 선생님. 덕분에 약을 먹지 않고도 일상을 유지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지난 5월 초, 심리상담을 종료했지요. 이 편지는 선생님과 헤어진 이후 한 달간의 기록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연결 되어있을 거라고, 연재하는 글로 어디서든 지켜보겠다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선생님께 말 걸듯 또 한 번 글을 씁니다. 읽고 계시리라 믿어요.
우리의 상담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던 날, 저는 어쩐지 졸업하는 느낌이었어요. 설렌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희망찬 마음이었어요. 정말로 많이 힘이 되었던 과정이었고 그래서 제가 지금 괜찮고, 건강하게 두 발로 서있어요.
무엇보다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많이 가능해졌으니까요. 사회적인 약속을 지키고, 일에 지장을 주지 않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내게 되고. 이 모든 것이 어려웠던 지난 6개월을 선생님은 지켜봐 주셨지요. 마음의 병이, 참사가 주는 트라우마가 이렇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일 줄은 저도 몰랐던지라 참 많이 어려웠습니다.
왜 이렇게 약속을 미루고 싶을까, 나가고 싶지 않고 그냥 잠수 타고 싶어지고, 무기력해져서 아무런 일 처리가 가능하지 않는 걸까. 제때 납부해야 하는 고지서들도 거들떠보기 싫고 무엇보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없어지던 기간이었어요. 이런 모든 것을 해내지 못하는 어른이라니, 이전 같으면 창피해서라도 해내고, 해내려 노력하는 사람이었을 텐데.
'될 대로 되라지'라는 마음이 제 몸과 마음을 지배해 정말 아무것도 못하겠던 그런 시간을 선생님과 함께 보냈습니다. 심리치료 상담 시간도 퍽하면 늦고, 겨우겨우 기어 오듯이 치료 공간에 당도하던 저를 보면서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요.
"시간이 되게 되게 오래 흐른 줄 알았어요"
치료고 뭐고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겉으로 보기엔 게으르고, 책임감 없이 도망이나 다니는 사람으로 비치기 딱 좋은 모습이었고, 아마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욕했던 게 사실이니까요.
그러던 제가 몸을 일으켜 조금씩 지각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은, 바로 이때였어요.
부끄럽지만 선생님, 저는 선생님 치료실을 찾아오다가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지요. 늘 오던 길이었는데, 잘 찾아오던 길이었는데. 갑자기 길을 잃어버렸어요. 그것도 공덕역 한복판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스마트폰마저도 배터리가 나가고 나니 일시에 패닉이 왔어요.
그리고 저는 30분을 헤맸지요. 길 위에 멍하니 서 있고, 땀을 뻘뻘 흘리며 넋 나간 사람처럼 서있는 저를 보고 어떤 분이 다가와 말을 걸고 도와주어 그나마 30분 만에 선생님께 도착했어요. 내가 왜 이러지, 이해가 안 갔는데 돌이켜보면 인지 능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던 거였구나 싶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제서야 느껴요.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많이 아팠다는 것을.
그렇게 도착한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 제가 길을... 잃어버려서요" 하고 풀이 죽어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왔으면 됐어요. 도착했으면 됐어, 정말로. 걱정 많이 했어요."
짧지만 강력한 순간이었어요. 그냥, 정신이 바짝 차려지더라고요. 나를 정말로 생각하고 계셔주신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너무너무 힘들지만, 애를 많이 쓰면서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그다음부터는 늦지 않으려고, 약속을 꼭 지키려고 노력하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했던 것이 차츰차츰 나아져서 종국에는 늦지 않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고, 점차 그렇게 일도 원래대로 수행 능력을 되찾았어요.
이런 선생님과 헤어지는 날이라니, 많은 가르침을 받고 '졸업'한다고 느낄 수밖에요. 마지막날은 뭔가 기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의 말을 들을 수 없으니 마지막 상담은 녹음을 해가야지 하고 녹음 기능을 켰거든요.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선생님 첫 마디가 저를 멍하게 했던 것 같아요.
"초롱씨, 우리가 만난 지 벌써 5개월이에요. 작년 11월 20일, 처음 우리가 만났어요. 처음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도 기억나요, 남색 아주 긴 코트에 목도리를 하고 왔지요."
별 이상할게 없는 이 한 문장을 듣고 저는 갑자기 울었잖아요. 왜 우냐고 물으셨고요.
"선생님, 저는 시간이 되게 되게 오래 흐른 줄 알았어요. 참사가 발생한 게 되게 옛날 일 같거든요. 근데 5개월밖에 안 됐다니요. 생각보다 너무 얼마 안 흐른 거예요. 제 시계는 되게 느리게 흘러갔어요. 지루했어요. 지겨웠고요. 시간이 너무 안 가서, 정말로 한 일 년은 넘었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선생님 말을 듣고 비로소 현실을 깨달아 버린 느낌이에요. 지난 시간이 허무해요 선생님.
돌아보면 참사가 벌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도, 저는 나 괜찮아졌다고 살만하다고 생각하고 느끼며 글도 쓰고 그랬던 거 같거든요. 그런데 그게 다 아니었던 거 같아요. 11월 20일 날짜를 말씀하시자마자 순식간에 그날이 생각나고 그때로 돌아가 버렸어요. 11월 20일이면 제가 한창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게 됐던 거고요.
괜찮지 않았던 5개월이구나, 괜찮으려고 부단히 노력 많이 했구나 생각나서 그냥 눈물 나요.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좋겠어요. 도대체 시간은 언제 빠르게 가요? 졸업한다고 신나서 왔는데, 다시 시작된 기분이에요."
그리고 이 모든 대화는 고스란히 녹음되었고, 저는 아직도 선생님이 그리울 때면 그날 녹음을 집에서 혼자 들으며 잠들어요. 선생님은, 제가 애를 많이 쓴 사실을 그동안 스스로 알아주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해주셨으니까요. 힘든 하루 끝에 애썼다, 오늘도 사느라 애썼다 알고 싶을 때면 여전히 그날의 대화를 듣습니다.
거절당하고 지치는 날들도, 잘 버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