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지나가는 차량과 소방차, 구급차가 한데 얽혀 마치 폭격맞은 전쟁터를 연상케 하고 있다. 1995.6.29
연합뉴스
언니를 만나자마자 들었던 말이 이거였어요.
"나는 참사 이후 30년이 지났잖아요. 내가 이후로 겁이 없어졌어요. 아무것도 무섭지 않고, 웬만한 건 놀라지도 않고. 너무 큰일을 겪으면 사람이 담대해진다고 하는데, 담대해졌다면 담대해진 거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워낙 크게 다친 사람이니까. 웬만한 상처는 상처도 아닌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언니의 말들이 저를 위로했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위안이 된다'. 살아있다는 마음이었어요.
언니, 즐겁게 일상을 살으라고 하셨지요? 노력은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저는 얼마 전에 도쿄에 다녀왔습니다. 좋아하는 밴드가 일본 도쿄돔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서요. '레드핫칠리페퍼스'라고 전설적인 그룹인데, 꼭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비행기를 타고 일본까지 날아가기로 마음 먹었던 것뿐이었어요.
그런데 죽을 것 같았어요. 비행기 문이 닫히고, 이륙을 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귀가 멍해지는 순간부터 폐쇄된 공간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저를 억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행기가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과, 갑자기 비행기가 공중 분해될 것 같다는 생각들 때문에 많이 무서웠어요.
물속에서 오래 숨을 참으면 가슴이 답답해져 오고, 빨리 물 밖으로 나가고 싶은 느낌이 있잖아요. 나는 분명 물 밖에 있는데, 여기 어디에도 물은 없는데 있지도 않은 물속을 느끼며, 자꾸만 물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그리고 그때 제가 느낀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창피함이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어린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저는 누가 봐도 사지 멀쩡한, 어른의 모습이었거든요. 용기내어 '제가 지금 힘듭니다, 도와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었고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안 도와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고민해 보면, 답은 간단했습니다. 참사에 대해서 많이들 외면하니까.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많이들 무관심하니까. 지난 몇 달간 제가 느껴온 것들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언니는 제게, 용기 내어 참사 초반에 글을 써주어 고맙다고, 모두에게 위로되는 일이니까 정말 대단한 일을 한 거라고 이야기 해주셨지요. 참사를 겪은 사람들이 자꾸 이야기해주고 나와주어야 한다고, 힘들겠지만 자꾸 이야기해 달라고.
용기 내 하나를 더 말해도 될까요?
레드핫칠리페퍼스 공연이 있던 도쿄돔은 4만 명이 수용가능한 아시아 최고의 공연장이었어요. 압도적인 공간 크기에 놀랐고, 왜 가수들이 평생 도쿄돔에 서보는 것이 꿈이라고 하는지 알겠더군요.
티켓값이 무지막지하게 비쌌지만, 신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한 공간에 있는, 어마어마한 공기와 분위기는 저를 순식간에 이태원 참사 현장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앞뒤로 사람이 꽉꽉 들어차있는 광경, 키가 작아 성인 남성들로 둘러싸여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아 어두컴컴한 느낌, 무엇보다 조금만 사람이 밀집해도 가슴이 턱 막히는 듯한 공포감은 다시 저를 울렁거리고, 어지럽게 했습니다.
언니, 저는 정말 눈물이 났어요. 모든 것이 공포스럽고, 나는 앞으로 이런 일을 몇 번을 더 겪어야 할까. 눈앞이 캄캄하고 미래가 걱정되는 기분,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공연장 질서를 빠르게 확립하고, 사람들을 줄 서게 만드는 공연 관리 업체 사람들의 움직임이었어요. 단호하고, 명확하고, 빠르게 그들은 사람들을 통제했습니다.
순간적으로 확 안심이 되더니 어지러움증이 사라지더라고요. 이건 무엇이었을까 오래도록 고민해봤습니다. 일본인들이 특별히 질서를 잘 지키는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그 4만 명을 수용하는 관리 인력 시스템이 잘 갖춰진 것 뿐이라고 생각해요. 대중은, 시민들은 시스템이 작동하면 그 안에서 잘 따르니까요.
'비행기 타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라는 제 질문에 언니는 이렇게 답하셨죠.
"나는 이제 괜찮아요,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동안 많이 치료했으니까."
이 말이 어찌나 제게 도움이 되던지요. 저도 괜찮아지겠죠? 저도 언젠가 다 괜찮아질 수 있다고 언니가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내가 이렇게 산증인이니까, 너도 믿어라라는 말처럼요.
그 말이 참 따스했어요, 이런 게 연대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