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가수 겸 목사.
최방식
말년 삶을 되돌아보며 '늘 내 방식대로 살았어'라고 고백하는 '마이 웨이'의 조용한 절규. 고요 속 공연이 끝났지만, 그의 맘 속 일렁임은 그치지 않았다. 음악으로 모든 걸 채울 수는 없다는 걸 절감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그렇게 목사가 됐다.
'딴따라'(과거 대중음악인을 낮춰 부르던 말)에서 목사로 변신한 주인공. 여주 시민사회운동의 터줏대감. 부정부패와 불의를 쫓아내는 데 빠질 수 없었다는 여주 시민사회운동의 산증인. 노래로 설교로, 시대정신을 전하고 구원론을 설파하는 그는 용을 쓰고, 노려보다, 마침내 무심(無心)에 이르니 허세를 이긴다는 장자(壯者)의 목계지덕(木鷄之德)을 이뤘을까.
왜 가수가 됐냐고 물으니 '그냥 좋아서'란다. 부모 모두 교사 생활을 했던 여주(양평 개군면은 당시 여주 소속)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했다. 명문 중학교 시험을 준비하던 차, 이른바 '뺑뺑이'로 바뀌었다.
"추첨으로 성수중학교에 갔죠. 깡시골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정말 밉더라고요. 때마침 공부도 싫어 놔버렸죠. 1학년 때 등록금으로 기타를 사고 말았거든요. 담임이 노래 잘한다며 성악하라고 했었거든요. 안 죽을 만큼 맞았는데, 제 반항의 시작이었죠."
가출, 싸움, 땡땡이(학교 안가고 놀기)가 일상이 됐다. 친구들이 대부분이 청계천 판잣집에 살았는데, 어느 날 광주대단지(성남)로 강제 이주됐고, 친구들을 찾아 그는 성남에 다니며 놀았다.
"만화방을 전전했죠. 형들이 시켜 구두닦이와 아이스께끼를 팔러 다녔어요. 밤이면 패싸움이 일이었죠. 여름방학 때는 해수욕장을 전전하기도 했죠. 등록금으로 산 기타는 놓지 않아, 여기저기 다니며 돈벌이를 할 수 있었어요."
인천동산고(야구로 유명)로 진학했다. 공부가 싫을 때니 저녁이면 가발 쓰고 업소에서 노래 알바를 했다. 선생님의 간곡한 권유와 노력으로 간신히 졸업장은 받을 수 있었고 서울보건대에 입학했다.
시작은 반강제(?) 군입대. 논산 신병 훈련소에서 만난 게 가수 김만수('하늘과 땅 사이에' 노래). 육군연예대 활동을 같이 했다. 그러다 하사관학교로 강제 입학했고, 경남지역 군부대에 배치돼 문선대(주로 공연) 활동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