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의식이 아니라 젠더불안이고 현실이다

[주장] <대전인권신문> 현숙경 소장의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재조명하며'에 대한 반론

등록 2023.06.05 19:27수정 2023.06.0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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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월평공원 습지길은 산책하기 좋은 코스다. 얼마전 화창한 오후, 습지길에서 길게 산책할 요량으로 도솔산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오른 지 5분도 되지 않아 등산로 가운데 한 남자가 소변을 보고 있다. 못 본 채 비켜 갈 수 있을지를 살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볼일을 보던 이가 태연히 나를 향해 몸을 돌린다. 실수로 마주친 것이 아니구나! 순간적으로 뒤돌아 습지길을 향해 뛰다시피 내려온다. 내려오자마자 습지길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불안'과 일상의 간격이 너무나 짧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이런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언제든 평범한 일상으로 끼어드는 에피소드와 같다. 그렇다고 무해한 건 아니다. 행위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불안과 불쾌감이 남는다. 그리고 한동안 잔상이 남아 언뜻언뜻 화가 나고 모욕감이 든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하며 상황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마음에서부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과 무력감까지... 스스로에 대한 유능감·신뢰감에 작은 흠집이 생긴다.

일상을 침범하는 미세공격들은 수십 년 동안 먼지처럼 쌓여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되레 조금씩 일상을 바꿔 놓는다. 성별 구조에 대한 이론보다 더 정확하게 구태의연한 현실을 각인시킨다.

혹자는 '피해의식'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막연한 불안감이나 피해의식이라면 나을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여성대상 폭력은 하루가 멀다하고 보도된다. 디지털 성범죄, 스토킹, 그루밍... 젠더폭력은 기술의 발전에 발맞춰 모습을 달리하며 같은 맥락으로 벌어지고 있다. 삶을 무너뜨리는 먼지차별과 젠더불안도 여전하다. 이런 에피소드 정도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 겪는 통과의례 정도로 치부될 지경이다. 여성의 안전과 자존감은 외줄타기 하듯이 사건과 사고를 넘나든다.

당분간 그 산책길은 기피한다. 그리고 동선을 바꾸거나 새로운 장소를 찾아 나설 것이다. 산책하다 만난 성희롱적 상황이라 다행이다. 누군가 출근길 버스나 지하철에서 당했다면 교통수단이나 동선을 바꾸느라 애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벌어졌다면 한순간에 일할 의욕이나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꺾였을 것이다.
 
이제 우리 여성들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남녀의 기능적 차이를 인정하고 성차별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지양할 때가 되었다.(대전인권신문 57호 5쪽)
 
<대전인권신문> 57호(2023년 4월호) 현숙경 소장의 글을 읽고 나니 참담하다. 인/권/신/문이 나를 이렇게까지 소외시킬 수 있을까? 내가 겪는 불안과 피해는 '여성이 경험하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그저 개인이 겪는 개별적 문제니 '여성 경험'으로 확대하지 말라고 한다. 여성은 '배려받아야 할 나약한 존재'가 아니니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한 명의 남편이 자기 부인을 때린다면 그것은 명백히 사적폭력이지만 백만 명의 남편들이 무지한 상태로 백만 명의 자기 부인을 때리고 있다면 거기에는 구조적 폭력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우리사회 젠더폭력의 전체 피해자 가운데 여성은 80~90% 수준으로 매우 높다. 이 사실만으로도 여성은 불리한 구조적 폭력에 놓여 있다.

그만큼 젠더불안은 도처에 깔려있다. 한국의 치안이 으뜸이라지만 밤길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다. 이전 공공 화장실은 남녀분리조차 되지 않은 열악한 시설이 많았다. 열악한 시설만큼 성범죄와 살인이 빈번히 벌어졌다(강남역 살인사건). 최근 공공 화장실의 시설은 나아졌지만 불법촬영 범죄의 온상이 됐다.


차별의 연속선상에서 폭력이 존재한다. 젠더불안과 젠더폭력의 밑바탕에는 우리 사회의 공고한 성차별이 존재한다. 우리 사회 성차별과 성평등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2018년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8차 한국정부 보고서를 심의했다. 위원회는 한국의 여성정책에 대해 "한국의 기술, 경제의 진보와 견줘 여성의 권리는 낙후돼 있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효과적인 성평등정책 추진체계 확립, 젠더폭력 예방체계 강화, 낙태 비범죄화 등에 관해서 권고했다. 이전 정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도 실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그리고 성평등 수준을 측정하는 객관적 지표는 국가성평등지수, OECD 남녀 임금격차, 성격차지수(GGI), 성불평등지수(GII), 남녀개발지수(GDI) 등이 있다. 2022년 기준으로 성불평등지수(GII)는 191개 나라 가운데 15위, 성격차지수(GGI)는 146개국 가운데 99위, 남녀개발지수(GDI)는 191개국 가운데 106위이다. 순위가 상위권과 하위권을 넘나들다 보니 부분적으로 인용해 성평등 수준을 낙관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각 지표는 산출목적과 방식이 달라 순위를 단순 비교 보다는 변화추이를 살피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표 결과에서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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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성평등지수 출처. 2022년 국가성평등보고서(여성가족부) ⓒ 이옥분

 
특히 주목할 지점은 모든 지표가 여성의 경제적 활동과 정치적 대표성 분야에서 점수가 지극히 낮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2021년 기준 국가성평등지수에 따르면 교육직업훈련 분야(94.5점)와 보건 분야(96.7점)에서 남녀의 격차는 적다.

그런데 의사결정 분야(38.3점)는 매우 낮은 수준이었고 가족분야(65.3점)와 경제활동 분야(76.4점)에서도 격차가 컸다. 여성의 고등교육기관 진학률과 학업 성취도는 매우 높으나 2021년 여성임금은 남성의 64.6% 수준으로 OECD 국가 가운데 꼴지다.

남녀의 교육직업훈련 수준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 분야에서 남성을 기준으로 여성 비율은 국회의원 20%, 4급 이상 공무원 19.3%, 관리자 24.2%, 정부위원회 위원 75.4% 수준으로 매우 낮다. 그리고 가족 분야도 가사노동시간(197%)과 육아휴직자(372%)는 여성에게 치우쳐 있어 돌봄노동에서 성별 편향성이 높게 나타났다.

이런 객관적 근거가 있음에도 성평등이 상당한 수준 향상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성들은 능력껏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낙관하고 있다. 얼마 전 금융권과 공공기관에서 채용시 점수 조작으로 여성을 떨어트린 사례가 적발됐다. 특정 시기에 한 두 곳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업계에서 관행적으로 채용 시 성차별이 이뤄졌던 것이다. 공공기관은 경영공시를 했기 때문에 드러났지만 다른 사기업의 사례는 은폐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구직사이트에서도 성차별적인 모집ㆍ채용 광고가 주기적으로 적발되고 있다. 경제활동 영역에서 공정을 얘기하고 있지만 능력에 앞서 성별로 구분하는 퇴행적 모습은 여전하다.

현숙경 소장이 지적한 '남녀의 기능적 차이'란 무엇일까? 생물학적 차이를 말하는가, 남녀의 역할이 다르다는 말인가? 역사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는 성차별의 근거로 이용됐다. 여성과 남성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 역할이 있어 가부장제가 전통이라고 얘기해 왔다. 사회적 진보는 가부장제가 남성-기득권 중심의 제도로써 여성을 인간-주체로 인정하지 않은 차별제도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고정되어 불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짓는 젠더 개념은 사회·문화적으로 변화하며 구성되어가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차이-다르다는 것을 핑계로 차별·배제하는 것을 '부정의'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기능적 차이가 있다는 본질주의적 태도는 구태의연하고 차별적일 수 밖에 없다.

글에서 "여성의 인권 신장 및 여성 해방을 외치는 페미니즘은 넓은 의미에서 막시즘의 분파인 것"이라는 말은 오류다. 페미니즘의 이론적 배경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맑스주의, 급진주의, 탈식민주의 등등 다양하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왜 이렇게 편향적으로 단정 짓고 싶어 하는지 의문이 든다. 페미니즘이 '막시즘의 분파' 즉 사회주의와 연결된 '좌파'라고 선정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일까? 우리 사회의 케케묵은 색깔 논쟁으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의 편향인가?

페미니즘은 근대의 이분법적인 구분에 저항했다. 남성-여성, 주체-객체, 이성-감정 등으로 구분하며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현숙경 소장이 페미니즘을 '막시즘의 분파'라고 편향적으로 구별 짓는 것은 오류일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 갈등 조장이다. 분별해서 편을 갈라 갈등하는 것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의 현실을 맑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길 바란다.

현숙경 소장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여성인권은 상당한 수준 향상'되었을지라도 그렇지 않은 더 많은 여성들이 있다. 그것은 통계고 수치일 뿐, 과장이라고 말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그 여성들에게 '피해의식'을 얘기하기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의 페미니즘에 응원하길 요청한다. 먼저 삶을 헤져나간 언니의 시선으로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대전인권신문 57호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재조명하며/현숙경>글에 대한 반박글이다. 대전인권신문에 글 게재를 요청했으나 거절해 오마이뉴스를 통해 실태를 알리고자 한다.
#대전인권신문 #성평등 #젠더불안 #미세공격 #피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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