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제2차 노숙문화제에 참석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문화예술인, 시민들이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파란불이 들어올 때마다 건널목에 나가 ‘함께 살자’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어보이고 있다.
유성호
늦어지는 재판을 기다리는 건 기업이나 노동자, 양 당사자에게 동일한 일이다. 그러나 늦어지는 재판기간 동안 겪어야 하는 현실은 기업과 노동자가 똑같을 수는 없다. 기업은 막대한 자금으로 대형로펌 변호사로 소송대리인단을 꾸리고 사건을 맡겨둔 채 자신들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변호사를 선임할 돈도 부족하고 지난한 재판기간 동안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버겁다.
한 IT노동자가 부당해고를 다투기 위해 약 3년 동안 법정공방을 벌인 후 패소했다. 대형로펌 변호사로 소송대리인단을 꾸린 기업은 변호사비용을 물어내라고 소송비용액확정신청서와 함께 내밀었던 소송비용청구서에는 그들이 재판을 위해 쏟아 부은 변호사선임료가 적혀 있었다.
1심 80,230,400원, 2심 76,249,800원, 3심 30,000,000원 합계 186,480,200원(약 1억 8648만 원).
기업이 돈을 쏟아 부어 호화 변호인단을 꾸리는 것이 허용되는 등 재판에서 무기대등의 원칙이 적용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재판이 공정하기 위해서는 힘 없는 자가 하루 빨리 송사에서 벗어나 일상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신속한 재판받을 권리는 헌법에도 규정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이다.
헌법 제27조 제3항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민사소송법 제199조(종국판결 선고기간)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 다만, 항소심 및 상고심에서는 기록을 받은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
민사소송법 제207조(선고기일) 제1항
판결은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2주 이내에 선고하여야 하며, 복잡한 사건이나 그 밖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때에도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4주를 넘겨서는 아니 된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제6장 형사소송에 관한 특례, 제21조(판결 선고기간)
판결의 선고는 제1심에서는 공소가 제기된 날부터 6개월 이내에, 항소심(抗訴審) 및 상고심(上告審)에서는 기록을 송부받은 날부터 4개월 이내에 하여야 한다.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해 민사소송법 등 관련 법에 여러 규정들을 두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규정들은 법전에만 있을 뿐 현실에서는 사라진지 오래다. 소송당사자는 재판을 지연시키는 재판부에 지연 경고를 할 수 있고, 과도한 재판지연으로 불이익을 받은 경우 보상이라도 받으면 좋으련만, 우리나라에는 독일의 재판지연보상법(법원조직법 198조, § 198 GVG) 같은 규정은 전무하다. 그러다 보니 당사자들은 재판지연에 속수무책이다. (
[오마이뉴스 시리즈] 헌법 27조 3항이 사라졌다 https://omn.kr/213nu )
한 해고노동자는 2020년 9월 16일 해고무효를 확인해 달라며 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
법은 소가 제기된 날로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고 규정되어 있지만, 첫 번째 변론기일은 소장을 제출한지 딱 1년째 되는 날인 2021년 9월 16일로 잡혔다. 그렇게 7번의 변론기일이 진행된 후 재판은 지난 5월 25일로 마쳤다.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그래도 빨리 1심 선고가 나서 회사로 복직할 수 있다는 희망도 잠시, 재판부는 선고기일을 약 6개월 뒤인 11월 9일로 지정했다.
법은 복잡한 사건이나 그 밖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때에도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4주를 넘겨서는 아니된다고 규정되어 있지만, 6개월 뒤로 선고기일이 지정되었다는 소식에 해고노동자는 또 한 번 좌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