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북구, 장석천 애국지사 제막식지난 2일 광주제일고등학교 정문에서 문인 북구청장과 박요주 광주학생운동 기념사업회 이사장, 황광우 장재성기념사업회 이사장, 고용호 광주학생독립운동 역사문화박물관 관장, 우재학 교장, 문석환 광주일고 총동창회장, 박동기 남녘문화연구소장, 한신원 광주일고 백년사 편찬위원장, 김재국 전남대학교 교수 등이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을 위한 장석천 애국지사 제막식에 참석하고 있다.
광주북구
지난 5월 2일, 광주광역시 광주제일고 교문 앞에는 사람들이 흥성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석천 선생이 부활하는 날이었다.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고초를 당하고 숨을 거두었으나 우리는 지금껏 그 이름을 모르고 살았다. 장석천 선생이 숨을 거둔 곳이 광주일고 교문 바로 앞이었다. 저 교문을 출입한 지 50년이 지난 오늘에야 선생의 거처가 이곳 교문 앞이었다는 사실을 알다니 참 부끄러웠다.
이날 선생의 현판제막식이 거행됐다. 줄을 잡아당기고 흰 천이 벗겨지면서 장석천 선생의 얼굴이 따스한 봄볕을 타고 우리에게 모습을 나타냈다.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작가님, 장석천 선생은 어떤 분이었나요?"
"1926년 6.10만세운동의 주역이 권오설 선생이라면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은 장석천 선생입니다. 장석천 선생은 1929년 11월 3일 터진 광주의 대시위를 전 조선으로 전파한 분이었구요.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르면서 치명적인 고문을 당합니다. 일제가 선생을 풀어주었을 때, 선생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자택에서 영면하였습니다. 1935년 33세의 젊은 나이로요."
누군가는 또 물었다. "작가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으로 촉발된 사건으로 배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는 것은 일본 관헌을 두둔하는 견해입니다. 일인 중학생 후꾸다가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겼고, 격분한 박준채가 주먹 다툼을 하였으며, 두 중학생의 다툼으로 인해 광주역 충돌 사건이 발발하였다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광주학생운동의 본질인 항일학생독립투쟁을 철부지 중학생의 주먹다툼으로 폄훼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따지듯 물었다. "작가님, 하지만 댕기머리 사건이 없었다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발발하지 않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이의 제기입니다. 비유하자면 댕기머리 사건은 불티였구요, 조선인 학생의 가슴에 쌓여온 적개심은 화약이었습니다. 다이나마이트가 터지기 위해선 도화선도 있어야 하고, 불티도 있어야 하지요. 댕기머리 사건이 불티였다면, 도화선은 11월 3일 광주 대시위였습니다. 그리고 광주 대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3천 리 방방곡곡, 154개의 학교에 내장된 화약이 동시에 폭발하게 됩니다. 전 조선인 학생들의 거국적인 항일운동이 터집니다.
역사는 우연과 필연의 조합입니다. 댕기머리 사건은 역사의 우연이었구요, 조선인 학생의 분노는 역사의 필연이었습니다.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우연의 이야기에만 주목하고 필연의 인과를 외면하는 것은 정당한 역사 해석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댕기머리 사건은 화약 창고에 투입된 수많은 불티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불티 하나에만 주목하고, 다이나마이트를 외면하는 시각은 일제 관헌이 좋아하는 입장입니다. 당시 언론은 '광주역 충돌 사건'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시 관헌들은 본국에 뭐라고 보고하였겠어요? '모시 모시, 아무것도 아닙네다. 철부지 중학생들이 벌인 패싸움에 불과합네다.'라고 보고하지 않았겠어요? 일본 관헌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갖는 '항일투쟁'의 본질을 은폐하고 싶었을 겁니다."
누군가의 표정은 짐짓 진지해졌다. "일부 몰지각한 공산주의자들이 배후에서 조종하여 조선인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하고 있다고 보고하였겠네요, 작가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배후에서 학생을 조종하지 않았습니다. 투쟁의 선봉에 서서 싸움을 이끌었습니다. 장석천은 격문을 썼고, 격문을 인쇄하였으며, 격문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보세요"
지난 12월 3일 시내 각 학교에는 '조선학생청년대중아 궐기하라'는 격문 수천 매가 배부되었다. 그 배부의 방법이 극히 교묘하여 교실마다 학생이 가장 잘 볼만한 벽에 붙여두었고 책상마다 서랍 속에 격문을 넣어 두었다. 종로경찰서에서는 사회단체 중요인물 127명을 검거하여 엄중히 취조하였는데 격문 작성과 인쇄, 배부의 주범은 장석천 등 10여명이었다. 배부된 격문은 장석천 등이 사흘 동안 2만장을 찍어, 그중 수천매는 시내에 배부하고, 나머지는 평양 대구 등 지방으로 발송하였다."
- 동아일보 1929.12.28. 호외,
누군가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작가님, 그 격문을 읽어볼 수 있을까요?"
"보세요. 이것이 장석천의 격문입니다. 나도 젊었을 때 유인물을 작성해보았지만 이런 명문은 처음 봅니다. 팔팔 뛰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는 것 같지 않습니까?"
조선학생 청년이여 궐기하라. 투쟁으로써 광주학생사건을 지지하라. 우리들은 이미 약자가 아니다. 반항이 있는 곳에 승리가 있다. 그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조선학생 청년이여. 그대들은 일본 이민배의 폭거를 들었으리라. 보라. 그들의 사법경찰관은 광주의 학생 400여 명을 참혹한 철쇠로 엮었다. 궐기하라. 우리들 선혈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조선의 이익을 위하여 항쟁적 전투에 바쳐라. 단결하여 궐기하라. 광주를 성원하라. 이후의 역사는 우리들의 것이 아니냐.
- 조선학생 청년대중이여 궐기하라, (1929.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