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반일 전적지 비문봉오동전투 전적지는 1993년에 도문시 통전부 등에 의해서 최초로 세워졌다가 2013년 도문시 인민정부에 의해 2013년에 뒤에 보이는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현재 새로 세워진 기념비에 봉오동 전투에 관한 내용은 빨간천으로 가려져 있으며, 앞쪽에 방치된 예전 기념비를 통해서 그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정희
무장독립운동 단체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1921년 1월 15일 상하이 임시정부에 청산리 전쟁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독립군의 전승(全勝) 이유
①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분옹결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심기를 압도한 것.
② 양호한 진지를 선점하고 완전히 준비를 하여 사격 성능을 극도로 발휘한 것.
③ 임기응수변의 전술과 예민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에서 벗어나서 뛰어난 것.
청산리전쟁은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정리하면 ① 백운평 전투 ② 완루루 전투 ③ 천수평 전투 ④ 어량촌 전투 ⑤ 맹개골 전투 ⑥ 쉬구전투 ⑦ 만기구 전투 ⑧ 천보산 전투 ⑨ 고동하 골짜기 전투 등이다. 독립군은 10전 10승을 이루었다.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26일 새벽까지 꼬박 6일 동안 밤낮으로 추위와 기아 속에서 전개되었다. 봉오동전투 때와는 달리 날씨는 맑은 편이었으나, 이 지역 10월 하순은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이는 등 대단히 추운 계절이었다.
봉오동과 청산리전쟁은 국치 이래 독립군이 이룬 가장 빛나는 대첩으로 꼽힌다. 독립군 중에는 신흥무관학교 등 군관학교 출신이 적지 않았고, 다수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기로 모여든 무명의 청년들이다. 반면에 적군은 일본 정규군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최강의 병력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통칭 '청산리전쟁'에서 일본군의 전사자를 약 1,200명이라고 추산하고, 중국신문 <요동일일신문>은 약 2천 명이라고 보도하였다.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박은식은 일본군 사망자가 약 2천 명이라고 추정하였다. 독립군의 희생은 극소하였다.
사망 1인, 상이 5인, 포로 2인.
아군의 전리품
기관총 4정, 소총 53병, 기병총 31병, 탄약 5천발, 군도 5병, 나팔 3척, 마안(馬鞍) 31차, 군용지도 4부, 완시계 4개, 기타 피복, 모자, 모포·휴대천막, 군대수첩 등속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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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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