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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청산대첩의 역사적 평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 33] 국치 10년 만에 최초의 항일전에서 승리한 전승

등록 2023.06.14 15:24수정 2023.06.1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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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뒤 독립군들이 찍은 기념사진 북로군정서로 추정되는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물리친 뒤 촬영한 기념사진 ⓒ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독립군 연합부대가 참전하여 이룬 봉오동과 청산리대첩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를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국치 10년 만에 최초의 항일전에서 승리한 전승이었다. 국난·국치·국망의 과정에서 수많은 의열·의병투쟁이 있었지만 대부분 개인 또는 소수에 의한 자기희생적인 투쟁이었다. 그런데 봉오동 전투는 800명, 청산리전투의 경우 5개 연합부대 1200명의 독립군이 참전하였다. 대한제국 군대가 1907년 강제해산된 후 최대 규모의 독립군이 편성되고, 게릴라전이 아닌 정규전으로 대승하였다.

둘째, 1919년 3·1혁명이 일제의 야만적인 학살작전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무참하게 진압된 후 국내의 의혈청년들이 국경을 넘고, 오래 전부터 만주일대에서 무장전쟁을 준비해온 독립군 지도자들과 힘을 모아 항일전쟁을 치렀다. 그런 의미에서 3·1혁명의 연장전이다. 3·1혁명이 비폭력 항쟁인데 반해 양대 전투는 무장전쟁이었다.

셋째,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총리 이승만의 비현실적인 외교노선에 빠져 있을 때, 만주지역 우리 독립군의 무장전쟁은 임시정부의 노선을 바꾸는 계기가 되고, 이후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에 이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게 되었다. 

넷째, 1876년 불평등한 강화도조약 이래 일방적으로 당해온 일제의 침략과 만행 그리고 수탈로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한민족이 봉오동·청산리대첩으로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고, 이후 일제패망 때까지 국내외에서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상무정신의 사상적 모태가 되었다. 

다섯째, 일제는 우리 독립군을 전투력이 없는 오합지졸로 얕보았다가 두 차례나 패전을 겪은 수모를 당하였다.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최신무기로 무장한 정예 제19사단 병력을 주축으로 각 사단에서 차출하여 2만 5천 명 규모의 군사력을 동원했으나 이번에도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이후 일제는 한국 독립군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여섯째, 우리 독립군은 오래 전부터 본격적인 항일전에 대비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중이던 체코군단으로부터 기관총 등 현대식 무기를 구입하여 국치 이래 최초로 무장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신흥무관학교 출신 군관들로부터 현대식 군사훈련을 받고 치밀한 작전으로 일본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는 우리 독립운동 단체들은 하나같이 무장독립운동을 목표로 삼았고 군사훈련과 신식 무기 구입을 서둘렀다. 


일곱째, 청산리전쟁은 각지에 산재해 있던 독립군 부대가 대표자회의를 열어 홍범도 장군을 사령관으로 추대하고 하나의 독립군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일제와 싸워 승리하였다. 독립운동 세력의 연대는 이후 중국 관내 독립운동가들의 유일당운동과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 국내에서는 신간회운동으로 나타났다. 

여덟째, 두 전투의 승리는 중국정부와 인민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하고 한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봉오동전쟁에서 패배한 후 보복으로 경신참변을 일으켜 간도지역 한인마을을 습격, 극히 제한된 통계를 통해서도 살해된 한인이 3,700여 명, 불탄 가옥이 3,300여 채에 이르렀다. 이같은 만행은 국내외 동포들의 대일 증오심과 독립정신을 불러 왔다. 


아홉째, 양대첩에 참전했던 이청천·이범석 장군 등이 한국 광복군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고, 황학수·오광선·조경한·고운기 등 간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주요 리더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가 외국땅에서 군사력을 보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실전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열 번째, 조선왕조는 일본의 무력 앞에 번번히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국권을 빼앗겼다. 임진왜란 때는 조총, 동학혁명 때는 무라타소총, 을사늑변 전후에는 고성능 대포까지 끌고 왔다. 봉오·청산 양대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이 대승을 한 것은 프랑스제 대포, 영국제 수류탄, 러시아제 기관총, 독일제 소총, 벨기에제 권총 등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연해주에 출병해 있던 체코군들이 그들의 나라으로 철수하면서 러시아로부터 제공받았던 무기를 우리 독립군이 구매하였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상룡 #석주이상룡평전 #이상룡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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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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