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7 11:10최종 업데이트 23.06.1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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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 전경. ⓒ Timothy J Brown

 
예술은 전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명소 내셔널 몰(National Mall)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하는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1982)는 전쟁이라는 거대 서사를 미시적으로 들여다 본 작품이다. 전쟁기념비라면 으레 적진으로 돌격하는 용감무쌍한 군인의 얼굴이던 때, 이 작품은 전쟁에서 희생된 목숨만큼이나 남겨진 이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헤아린 사려 깊은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는 알파벳 V자가 125도 각도로 넓게 벌어진 모양의 검은색 벽면이다. 약 150미터 길이의 흑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벽면은 마치 예리한 날에 깊게 베인 상처처럼 중앙부가 움쑥하게 패여 들어가 세워져 있다. 그저 차가운 돌벽일 뿐인 이 단순한 형태의 조형물 앞에 선 사람들은 벽에 손을 대거나 기대면서 애써 묻어뒀던 감정을 꺼내든다. 
 

베트남전 참전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를 쓰다듬고 있는 사람. ⓒ UPI/연합뉴스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에서 희생자 이름을 탁본하고 있다.(사진: Vietnam Veterans Memorial Fund) ⓒ vvmf


이들이 어루만지는 기념비의 표면에는 1956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약 20년간 계속된 베트남전에서 희생된 5만8000명이 넘는 미군들 이름 하나하나가 사망년도순으로 새겨져 있다. 이를 탁본하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기념비에 종이를 대고 연필을 문질러 더이상 볼 수 없는 가족 혹은 친구의 이름을 정성스레 떠낸다. 

블라인드 공모전 당선자는 스물한살 중국계 여성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의 묵묵한 애도 방식은 믿을 수 없게도 겨우 스물한살에 불과한 대학생이 설계했다. 그 주인공은 당시 예일대학교 건축과에 재학 중이었던 마야 린(Maya Lin, 1959)이다. 전문적 경험이 전무한 학부생에 불과했던 린은 1981년 미의회가 주최한 전국 규모의 공모전에서 1421명에 달하는 지원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수상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1981년 5월 공모전 당선 당시 마야 린은 21살의 예일대 건축과 학부생이었다. ⓒ Maya Lin

 
미국으로서는 처음 치르는 사상 최대 규모의 공모전이었고, 지원자 중에는 그를 가르치던 학과 교수가 포함되었을 정도로 경쟁은 치열했다. 린은 자신의 설계안에서 죽음이란 결국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이기에 개인의 성찰과 개인적 청산을 위한 고요한 '공원 속 공원'으로 구상했다고 제작 의도를 밝혔다. 그는 전사자들을 전쟁과 분리하여 기리며, 동시에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한 추모 공간을 디자인했다. 불굴의 군인정신을 영웅적 규모로 묘사한 조형물을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기획안은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생소했다.

전쟁기념물의 상투적 표현에서 벗어나는 린의 기획안은 블라인드 심사가 아니었다면 당선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연히 당선작이 공개된 뒤부터 기념비가 설치되기 전까지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단순히 린이 베트남전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 나이의 여성일 뿐 아니라 미국이 수호하는 가치와 이상을 모르는 중국계 이민 2세라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또 설계안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친 구조가 아니라 참호처럼 땅속에 파묻힌 형태라는 점, 슬픔과 수치를 의미하는 검정색을 사용했고, 반전운동의 상징인 평화의 'V 사인'을 모방한 잠재적 반전 메시지라는 해석들도 장벽이 되었다. 베트남전 퇴역 군인들 일부는 '묘비'를 떠올리게 하는 검정색 대신 흰색으로 변경하고 대형 상이용사 조형물과 미국기를 추가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린은 거부했다. 실제 그의 디자인은 1) 참전용사의 이름 전체를 포함할 것 2) 미국 시민권자일 것 3) 설계자 본인의 정체성을 강조하지 말 것 4) 비정치적일 것 등 애초 공모전의 내건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것이었기에 문제삼기는 어려웠다. 
 

프레데릭 하트의 <세 군인>. 이 작품은 전쟁 기념물에 대한 당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 Marvin Lynchard, DOD

 
결국 공모전 추진위원회는 린의 원안을 해치지 않되, 후보작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작이었던 프레데릭 하트(Frederick Hart)의 <세 군인(The Three Soldiers)>을 근방에 함께 세우는 것으로 최종 결정지었다. 하트는 백악관, 국회의사당, 미 연방대법원 등 주요 정부 건물의 외벽 장식을 책임져 온 조각가였다. 그가 사실적으로 묘사한 세 군인의 형상은 린의 작품이 설치된 지 2년 후인 1984년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 초입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상 당대가 이해한 전쟁기념물의 형태는 린의 추상적 형태보다 하트의 구상적 표현에 가까웠다. 

1982년 11월 13일,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건립에 성공한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는 많은 우려와 달리 공개 즉시 모든 논란을 종식시켰다. 잃어버린 가족과 친구의 이름을 찾는 방문객들의 모습이 반짝반짝 갈고 닦아 거울처럼 윤이 나는 기념비의 표면에 그대로 반사되었다. 떠난 이와 남은 이가 공존하는 시공간. 린이 의도한 추모와 힐링의 공간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는 베트남전을 두고 두 쪽으로 갈라졌던 미국을 봉합하는 역할을 했다. 
  
워싱턴-링컨과 연결된 베트남전 참전용사들

베트남전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뼈아픈 상처다. 냉전체제 속에서 남베트남과 주변국의 공산화를 막겠다고 시작한 명분 없는 군사 개입은 미국 사회를 분열시켰다. 베트남전을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이 행정부와 시민사회 내부에서 대립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전운동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승산 없는 싸움을 고집하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후에야 패배를 시인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 건립은 이 불명예스러운 전쟁에 대한 사후 수습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인 1979년 베트남 참전용사 얀 스크럭스가 기념비 제작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쟁 기념비라면 승전을 자축하기 위해 세워져야 할 터인데, 당시는 완벽한 패전을 기념해야 할 판이었다. 기념비 사업 자체가 논쟁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불 밝힌 저녁 무렵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 저 멀리 워싱턴 기념탑이 보인다. ⓒ Academy of Achievement

 
이런 상황에서 마야 린은 무엇을 기리고 조명했을까. 그는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를 워싱턴기념탑과 링컨기념관을 향해 양팔을 벌린 듯한 병풍 구조로 만들었다. 워싱턴기념탑과 링컨기념관은 내셔널 몰의 핵심 랜드마크로 미국의 정신을 상징한다. 린은 이 두 공간에서 소실선을 그어 교차하는 지점을 기념비의 중심축으로 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중심축에서 양갈래로 뻗어나가는 두 개의 벽면을 만들고, 그 위에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음각해 넣은 것이었다. 이로써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에 새겨진 이름들은 미국이 자랑하는 역대 최고의 두 대통령과 동일 선상에 놓이게 됐다.

또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는 지면을 삼각도로 파낸 것처럼 중심축으로 갈수록 서서히 깊어졌다가 바깥쪽으로 나오면서 다시 얕아지는 모양을 한다. 기념비 벽면을 따라 걷다보면 사람들은 마치 전쟁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름들의 수에 압도되었다가 서서히 그 이름들이 크게 하나의 상실과 고통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베트남전이라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전쟁 속으로 사라진 보통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린은 승자의 기록에 가까웠던 전쟁기념비를 기억과 참회의 공간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한 참배객이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를 어루만지며 지나가고 있다. ⓒ Marvin Lynchard DOD

 
많은 이들이 아시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어린 나이의 여성은 전쟁을 알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야 린은 전쟁의 참상이 TV를 통해 여과 없이 생중계되고, 베트남전이 남긴 폐해와 상처를 다룬 영화 <디어 헌터(Dear Hunter)>(1978)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1971)이 전 세계로 울려퍼지던 시절을 경험했다. 미국 미술계에서도 크리스 버든(Chris Burden)처럼 자신의 팔을 향해 실제로 총을 쏘는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전쟁이 만드는 지옥을 직감하게 하는 등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 선보였다.

반면 린은 폭력과 파괴의 생생한 묘사 대신 전쟁이 낳은 비극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시공간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전쟁기념물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렸다. 그리고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는 오늘날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후 린은 미국 시민권 운동의 진원지인 알라바마의 주도 몽고메리에 <민권 기념비(Civil Rights Memorial)>(1989)와 예일대에서 교육받은 수많은 여성들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여성의 탁자>(1993) 등의 공공조형물을 세우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시각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5월 28일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를 앞두고 한 어린이가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에서 희생자의 이름을 읽고 있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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