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3 19:18최종 업데이트 23.09.2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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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루브르 박물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만큼이나 지대한 관심을 받는 초상화가 있다. 작자 미상의 작품인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Portrait of Gabrielle d'Estrées with Her Sister)>가 그 주인공이다.

한 여성이 쌍둥이처럼 닮은 다른 여성의 젖꼭지를 손끝으로 집고 있는 모습은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강한 잔상을 남긴다. 지금의 시선에서 이 작품은 동성애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실제로 이 작품은 레즈비언의 역사와 문화를 입증하는 이미지로 쓰이곤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탄생 배경이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종교전쟁이 한창이던 16세기 말 프랑스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동성간의 사랑은 허용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성은 드러내놓고 거론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원작자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그림을 두고 제작 의도를 함부로 단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는 누구이며 어떻게 이런 포즈로 그려질 수 있었을까?

앙리 4세가 사랑한 정부, 가브리엘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Portrait of Gabrielle d'Estrees with Her Sister)>

 
지금까지 이 그림은 가브리엘의 임신을 공표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논의되어 왔다. 가브리엘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앙리 4세(Henri IV, 1553-1610, 재위 1589-1610)가 가장 사랑했던 정부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화면에서 오른쪽을 가브리엘로, 왼쪽을 그의 여동생인 줄리엔으로 추정한다.

줄리엔의 제스처는 가브리엘의 임신을 관람자에게 알리는 행동으로 해석된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유방을 강조하는 표현은 비너스 또는 아기 예수에게 수유하는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통해 임신과 풍요의 알레고리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화면 뒤편에서 바느질을 하는 여인의 모습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베냇옷을 준비하는 모양새다.

가브리엘의 왼손에는 앙리 4세의 대관식 반지가 들려있다. 그가 받은 사랑의 증표다. 사실 앙리 4세는 1588년 이미 왕위를 계승했으나 대관식을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신교도 출신의 국왕을 인정할 수 없던 구교도 세력이 내전을 일으킨 탓이었다. 결국 프랑스의 신교도인 위그노의 정치적 지도자였던 앙리 4세는 1593년 가브리엘의 조언을 받아들여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그리고 이듬해에 대관식을 올린 뒤 그녀를 정식으로 왕비로 추대하기 위해 교황청에 이혼을 청원했다. 그는 당시, 우리에게 영화 <여왕 마고>(1994)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혼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는 이러한 일련의 이벤트들이 이어진 해에 국왕의 아이를 가진 가브리엘의 지위를 입증하는 그림으로 이해되어왔다.
 

프랑수아 클루에의 <목욕하는 여인>

 
반라의 여성이 욕조에 앉아있는 구도의 그림은 일찍이 프랑수아 클루에(Flançois Clouet)에 의해 선보인 바 있다. 클루에는 프랑스 왕실 초상화가로 활약한 퐁텐블로파(École de Fontainebleau)의 주요 인물이다. 퐁텐블로파는 16세기 프랑스의 퐁텐블로 성에서 꽃핀 미술양식을 말한다. 퐁텐블로 성은 프랑스를 다스린 왕들이 가장 선호했던 궁전 중 하나다.

16세기 초, 중세의 모습으로 낡은 성을 화려하게 증축하기 위해 프랑수아 1세는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Francesco Primaticcio)와 로소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와 같은 걸출한 이탈리아 미술가들을 초대해 퐁텐블로 성의 실내 장식을 맡겼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그의 계획을 실현할 미술적 전통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클루에는 이들이 뿌리내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어받은 미술가였다.

붉은 장막이 드리워진 연극무대 같은 공간에서 반라로 욕조 안에 앉은 여인, 아이를 안고있는 노파, 화면 뒤에서 일하는 여성, 장작이 타고 있는 벽난로와 그 위에 걸린 그림 등은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에서도 반복된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은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가 클루에를 참고한 퐁텐블로파의 작품으로 보게하는 대목이다.
 

퐁텐블로파의 작자미상 그림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녀의 동생 빌라르 공작부인>

 
앙리 4세는 종교전쟁(1592-1598)으로 중단되었던 퐁텐블로파의 활동을 다시금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왕이었다. 퐁텐블로 성에 애정을 두고 개·보축을 진행했던 그는 플랑드르 화가 앙브루아즈 뒤부아(Ambroise Dubois)를 비롯해 프랑스 화가 투생 뒤브레이유(Toussaint Dubreuil)와 마틴 프레미네(Martin Fréminet) 등을 후원하며 제2차 퐁텐블로 양식을 이끌었다.

16세기 후반 제작된 다양한 버전의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는 앙리 4세가 이어가려던 퐁텐블로파의 명맥을 확인시켜준다. 특히 자매들이 옷을 입고 등장한 화면에서 가브리엘은 관람자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이제 막 태어난 아들과 함께 그려진다. 이러한 차이는 상대적으로 왕의 정부로서 그의 지위를 존중하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가 가브리엘의 출산을 기념하기 위해 앙리 4세의 요청으로 퐁텐블로파에 의해 그려졌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작자미상, <첨리스 자매와 포대기로 감싼 아이들>

 
한편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가 소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7세기 초 영국에서는 <첨리스 자매들(The Cholmondeley Ladies)>이 그려졌다. 이 그림은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와 너무나 흡사해 퐁텐블로파의 영향권을 짐작하게 한다.

화면의 하단부에는 같은 날 세상에 태어나서, 같은 날 결혼했고, 같은 날 출산한 쌍둥이 자매의 초상이라는 소개글이 덧붙여져 있다. 자매들은 똑 닮아 보이지만 왼쪽의 인물은 파란 눈동자를, 오른쪽의 인물은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졌다. 이들이 안고 있는 아이들의 눈동자에서도 이러한 표현은 반복된다. 게다가 자매의 옷 표현과 공간 표현은 퐁텐블로파의 그림보다 훨씬 장식적이고 평면적이다. 이러한 미세한 차이는 영국 미술 고유의 특징을 드러낸다.

레즈비언 커플의 에로스

위와 같은 맥락에서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는 오랜시간 '자매'와 '임신과 출산'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들은 이를 해체하는 시도를 제안한다.

관객을 향한 자매의 대담한 시선 처리,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된 자매의 몸, 볼록하게 솟아있는 유두, 금발과 브라운 헤어가 한쌍을 이루는 표현은 이 그림이 에로스를 주제로 삼은 작품으로 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16세기 프랑스의 저술가 피에르 드 브랑톰(Pierre de Brantôme)이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그리스 등지에 레즈비언 커플이 많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런 여성들은 꽤나 일반적이다"고 남긴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

그의 글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보다 촘촘한 검증 과정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자매>를 둘러싼 최근의 논의는 시대를 보는 눈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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