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6 15:01최종 업데이트 23.10.20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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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2년 3월 21일 미국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공개된 앤디 워홀의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 크리스티의 마크 포터 회장이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후 5월 9월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은 20세기 미술품 중 최고가인 1억 9500만 달러에 낙찰됐다. ⓒ Getty/연합뉴스

 
2022년 5월 9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20세기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가 경신되었다.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Shot Sage Blue Marilyn)>이 우리 돈으로 약 2470억원(1억 9500만 달러)에 낙찰된 것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름, 워홀이라는 작가의 위력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윽하게 내리감은 눈과 반쯤 벌어진 입술이 트레이드 마크인 할리우드 스타 마릴린 먼로의 초상이 워홀의 작품에 등장한 것은 1962년부터다. 먼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지고 떠난 지 불과 세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워홀은 먼로의 출세작이었던 영화 <나이아가라(Niagara)>(1953)가 홍보용으로 삼았던 흑백 보도사진을 클로즈업하고, 그 위에 레드, 블루, 옐로우, 그린색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찍어냈다.

당시 실크스크린 기법은 주로 광고 전단 제작에 사용되던 상업용 인쇄술이었다. 순수미술 제작방식이 아니라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방식으로 조악하게 색을 입힌 먼로의 얼굴은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이자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고인을 향한 애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다", "독창적이지 않다", "사기꾼이다", "반페미니스트다" 등의 상당한 논란을 낳았다.

성모 마리아의 자리에 마릴린 먼로를  

그렇다면 앤디 워홀은 왜 하필 먼로의 사망 이후부터 그의 초상을 자신의 작품의 소재로 삼았던 것일까? 게다가 이미 1950년대 초 뉴욕에서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온 그는 왜 직접 자신의 손으로 그리지 않고 기계적인 제작방식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그의 먼로는 어떻게 지금까지 이토록 높은 인기를 누릴 수 있는 걸까?
 

왼쪽의 성모 마리아를 그린 러시아의 성화 <블라디미르의 성모>(12세기)와 오른쪽의 <골드 마릴린 먼로>(1962). 둘 다 바탕색이 금빛인데, 과거 성화에는 실제로 값비싼 금가루를 사용했다. ⓒ MOMA

 
워홀은 먼로의 초상으로 총 24점의 연작을 제작했다. 그 시작점에 <골드 마릴린 먼로>(1962)가 있다. 황금빛 너른 바다 위에 먼로의 얼굴이 부유하듯 떠있다. 금빛 바탕색은 중세시대 이콘(Icon)의 특징적 표현이다. 워홀은 값비싼 금가루 대신 금빛 물감을, 성모 마리아 대신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섹시 스타를 숭배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것은 황금만능주의와 물신숭배 사회가 예찬하는 영원불멸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마릴린 두 폭 제단화>(1962) ⓒ 테이트갤러리

 
같은 해 제작된 <마릴린 두 폭 제단화>(1962) 역시 성화의 전통을 따른다. 두 폭 제단화란 교회에서 제단 후면을 장식하는 그림으로 주로 성인(聖人)이나 성가족이 묘사된다. 두 개의 캔버스를 두 폭 제단화처럼 연결한 이 작품은 먼로의 초상을 각각 5x5의 배열로 나열한다. 좌측 캔버스에서 먼로의 얼굴은 형형색색의 컬러로 제시된 반면, 우측의 캔버스에서는 흑백으로 처리되었는데, 잉크가 고르게 분포되지 않아 뭉개지며 유령처럼 희미하게 흩어진다.

이러한 병치는 대중의 인기로 사는 유명인사로서의 화려한 삶과 그 이면의 덧없음을 대조적으로 표현한다. 한편, 마치 고속 윤전기에서 쏟아져나오는 인쇄물처럼 판에 박힌 이미지의 반복적인 나열은 먼로의 독보성을 약화시키며,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의 공적 페르소나가 실은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영화 <나이아가라>에서 로즈 루미스로 분한 마릴린 먼로의 공식 사진. 훗날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 등 앤디 워홀의 작품에 사용됐다.

 
워홀에게 마릴린 먼로의 초상은 시대의 아이콘이자 전후 미국사회의 특징이었다. 특히나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대목은, 먼로의 비극적 사망소식마저도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섹시 스타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현상이었다.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로 규정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와 같은 현상을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시뮬라크르'란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이미지를 말한다. '마릴린 먼로'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백치미녀라는 허상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가 상품 그 자체보다 대중매체 광고의 반복노출 효과로 인해 상징적 가치를 소비하게 되듯, 먼로의 삶과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할리우드 영화가 만든 성공적인 상품으로서의 섹시 스타 이미지가 끊임없이 범람하는 세계가 바로 워홀이 포착한 전후 미국사회의 현실이었다.

작품의 가격이 작품의 가치를 의미하는 시대       
 

워홀이 미술계에 입성한 1960년대 초 미국 사회는 모든 제조 과정을 자동화 생산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하며 유례없는 경제적 활황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전 가구의 90%가 텔레비전을 보유했고, 이를 통해 먼로와 같은 할리우드 영화배우를 비롯해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와 같은 대중문화의 신화적 존재들을 접할 수 있었으며, 각종 광고 매체의 발달과 함께 소비지향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였다. 워홀이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 즉 공장이라고 명명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워홀은 팩토리에서 조수들을 고용해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대중매체에서 얻은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기법과 같은 기계적 시스템으로 대량생산했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전통적으로 오롯이 작가의 온기에 의존하던 '작품' 개념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서 창작활동이란 고뇌의 시간 끝에 자신의 손을 거쳐 완성하는 그 무엇이 아니었다.
 
작품을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방식은 당시 화단을 지배하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추상표현주의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미술의 중심지를 유럽에서 뉴욕으로 이동시키는 데 절대적 역할을 하며 가장 미국적인 미술양식으로 각광받았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잭슨 폴록이 대표주자다. 대형 캔버스에 거친 붓질로 물감을 아낌없이 뿌리고 펴 바르는 그의 액션페인팅은 작가의 정신세계를 신체 제스처로 표현한 창조물이다.
 

지난 2010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전시회에 전시된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깡통>(왼쪽)과 <빅 캠벨 수프 깡통>. ⓒ EPA/연합뉴스

 
워홀은 이렇듯 개성 넘치는 수공예적인 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완전히 폐기했다. 그는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예술이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해석이 필요없는 가장 대중적인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며 엘리트주의 미술에 반기를 들었다. 그가 가장 상업적인 소재를 선택하고 이를 공장에서 상품을 찍어내듯 제작하는 방식은 전후 미국사회의 특징인 소비자본주의 물질문화와 기계적 대량생산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마릴린 먼로는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섹스 심벌로 기억되고 소비된다. 그리고 먼로를 팝 스타에서 팝아트 상품으로 기획했던 워홀은 이제 현대미술의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 마치 기업의 CEO처럼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지우고 관람객을 소비자로 이해했던 워홀은 오늘날 우리가 먼로를 그의 작품이 새겨진 일상용품으로 소비할 것을 예견했던 건 아닐까? 그가 만든 먼로의 초상이 20세기 미술 중 최고가를 기록하는 이유는 그가 내다본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논리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 아닐까? 어느새 작품의 가격이 작품의 가치를 의미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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