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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죽은 73명, 한 사람의 기록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강화 송해면 순의비 건립 앞장선 고 이병년 선생... 강영뫼서 인민군에 희생된 사람들 추모

등록 2023.06.17 14:20수정 2023.06.1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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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석 옹이 할아버지 이병년 선생의 사진을 들고 있다.
이희석 옹이 할아버지 이병년 선생의 사진을 들고 있다.조근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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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군 강영뫼(하점면 창후리~양사면 인화리 경계)에는 지난 1950년 6.25 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73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한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산 5번지에는 순의비(殉義碑)가 큰 나무 아래 고고히 서 있다. 순의비는 인민군에 희생당한 '강명뫼 73명의 순의자'들의 영령을 위로하고 이들을 추념하기 위해 건립됐다.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눈부시게 부서지는 화창한 날씨에도 순의비는 70년 전 있었던 처참한 고통을 그대로 안고 서 있는 듯 서늘한 기운을 풍긴다.

비석은 1966년 양사면 인화리에 건립됐지만 도로공사로 송해면 하도리 208-2번지로 이전했고, 2019년 5월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 비석에는 비를 세운 이유, 건립을 추진한 사람들, 희생자명단 등이 적혀있다. 순의비는 여느 유사한 비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노력과 집념의 결과이기도 하다.

강화 간곡노인회 회장을 지낸 고 이병년(李秉秊, 1893~1982) 선생은 강화 강영뫼에서 죽은 73명의 억울한 사연을 알고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순의비 건립에 앞장섰다.

이병년 선생은 1966년~1977년, 11년간 순의자들을 위한 제막식과 위령제를 거행하면서 당시 조위금 기부자 명단, 금액, 위령제사 조문, 초청장 발송대상, 유가족 현황, 신문기사, 73인의 순의자 개인이력, 위령비문, 도면 등 자료를 꼼꼼하고 정성스레 모아 보관했다. 이 자료들은 '강영뫼 순의자 칠십삼인 위령행사 추진관계서류철'에 차곡차곡 쌓여있었고, 그의 손자 이희석(李喜錫, 85) 옹이 오픈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에 협조하지 않고 죽음 맞이한 73명의 반공 애국지사
 
 순의비 뒷면에는 강화 강영뫼에서 희생된 73명의 순의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순의비 뒷면에는 강화 강영뫼에서 희생된 73명의 순의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조근직

이병년 선생은 1954년경부터 강영뫼 사건을 인지하고 자료를 모았다. 위령제와 순의비 건립을 위해 친지, 지역유지, 경찰서장, 국회의원 등을 찾아다니며 지원과 협조를 요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 1966년 관계기관의 지원을 받아 첫 위령제를 지냈다.


특히 강화 삼도직물공업(주) 김재소 사장이 상당한 도움을 줬다. 위령제는 1977년까지 이어졌다. 이병년 선생은 한성제1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신계군수와 옹진군수를 역임한 고위관료이자 지식인이었다.

이희석 옹의 증언에 따르면 "위령제를 지낼 때마다 집안사람들이 동원되어 부침개니 떡 등 음식을 준비하며 할아버지 시중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강영뫼 73인의 희생자는 북한 측에 협조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반공대열에 투신하거나 지하운동으로 국군에 정보를 제공한 반공애국 지사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희석옹과 함께 73명의 순의자들이 집단학살당한 강영뫼(중외산)의 골짜기를 찾아가 보았다. 산 초입에서 내려 숲길로 10분 정도 걸어들어가니 당시 학살현장이 보였다. 6.25 전쟁 당시만 해도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뜸한 으슥한 장소였다. 찰떡이 구르면 흙이 묻지 않았다는 우스갯말이 있을 정도의 민둥산이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때부터 산림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숲이 우거졌다.

이희석 옹은 인민군이 포박된 인질을 골짜기 아래로 밀어 넣고 위에서 총과 삽으로 사람들을 죽였다고 전한다. 그는 "73명의 순의자들 시신은 나중에 유족들이 거적을 가지고 와서 수습해 갔는데 너무 참혹했다"며 "희생자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었기에 대부분 후손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손자 이희석 옹 자료 공개, <강영뫼의 창>으로 소개
 
 이희석 옹이 강영뫼 73명의 순의자들이 죽음을 맞은 현장을 찾아 당시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이곳은 당시만 해도 인적이 드문 장소로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다고 한다.
이희석 옹이 강영뫼 73명의 순의자들이 죽음을 맞은 현장을 찾아 당시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이곳은 당시만 해도 인적이 드문 장소로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다고 한다.조근직

1977년 이후 위령제는 끊어졌다. 강영뫼 73인 순의자들의 이야기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이희석 옹은 할아버지 이병년 선생의 손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역시 6.25 전쟁 중에 납북됐다.

"6.25 전쟁 때 제가 국민학교 6학년이었어요. 아버지가 당시 하점면에서 농회장을 맡고 있었지요. 인민군이 강화도를 점령하자 아버지가 지서로 끌려갔고 산업조합 창고에 감금돼 있었는데 제가 그때 아버지에게 밥을 날라다 드렸어요. 하얀 옷을 입고 계셨지요. 아버지는 9.28 서울수복 직전 북쪽으로 끌려갔어요. 송해면 당산리를 거쳐 철산리로 가는 아버지를 먼발치에서 바라봤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할아버지는 반공정신이 강한 분이었어요. 당시 시대상도 그랬고, 아들이 납북됐기에 더 열심히 강영뫼 73인의 순의자들을 추모하는 일에 매진했던 것 같습니다."

이희석 옹은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위령제나 추모행위가 계속되기를 바랐다. 이번에 할아버지의 자료를 공개한 이유도 그 같은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는 "할아버지가 모아놓은 이 자료를 체계적으로 만들어 세상에 강영뫼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다"라며 "다행히 인천문화재단과 연결이 돼 그곳에서 책으로 제작해줘 빛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병년 선생이 모아두었던 '강영뫼 순의자 칠십삼인 위령행사 추진관계서류철'과 '강영뫼 순의자 73인의 위령비 건립 그날까지' 장문의 글은 2022년 인천문화재단에서 <강영뫼의 창>이란 책으로 출간돼 강명뫼 사건을 재조명하며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희석 옹은 지난 40년간 교육계에서 헌신했다. 2000년 교장으로 정년을 한 뒤 고향 강화에서 강화향교 유도회 회장과 전교를 지냈고 현재는 강화향토방위특공대 전우회 회장, 창후1리 새마음노인회 회장을 하며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희석 옹 역시 1.4후퇴로 강화에 행정과 치안공백이 생겼을 때 강화를 좌익이나 북한으로부터 사수하기 위해 결성된 향토방위특공대에서 소년 연락병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그의 나이 13~14세 때다. 어린 나이에도 방위대원들의 심부름을 하며 특공대를 도왔다.

강화 강영뫼에서 희생당한 73인의 순의자 사건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조사위원회' 조사결과 인민군, 지방좌익의 소행으로 2008년 확인·결정됐다.

6.25 전쟁 중 민간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주체들은 다양했다. 무고한 죽음을 당한 영혼들은 억울했고, 유족들은 깊은 한을 갖게 됐다. 어떤 이유에서든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을 죽이는 일이 용납돼선 안 되는 이유다. 보훈의 달을 맞아 한국전쟁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넋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죽음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순의비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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