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숨바꼭질에 진심이었던 나

아이와 대등하게 놀이할 때가 기다려집니다

등록 2023.06.16 08:33수정 2023.06.1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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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에 진심인 나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숨바꼭질은 자고로 한정된 공간에서 하는 것이 놀이의 재미를 최대로 끌어올리는 법이다. 한계가 설정된 공간 안에서 어떻게든 숨을 공간을 찾거나 만들어내어 몸을 숨기는 것이 놀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술래가 자신을 쉬이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수색의 망을 좁혀들며 다가오는 술래에게 발각당할 수 있다는 긴장감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이 놀이는 역동성을 부여 받는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숨바꼭질은 내 방이라는 나의 공간이 생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장소는 내 방, 술래는 언제나 엄마의 몫이었다. 한눈에 내부의 전경이 들어오는 작디 작은 방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의 허를 지를 수 있을지 머리를 최대한 굴려야 한다. 이불 속이라든가 문 뒤, 책상 아래 공간은 너무 뻔한 곳이다.

쉽게 예상 가능한 공간에 숨는 것은 술래 입장에서도, 숨는 사람 입장에서도 재미가 없다. 창턱에 올라가 커튼으로 몸을 가리고 설정된 공간을 벗어났으니 편법이긴 하지만 창문을 통해 방과 연결된 베란다에 몸을 숨기기도 한다. 생각해낸 후 가장 뿌듯했던 것은 문 뒤편에 걸려 있던 붙박이형 옷걸이에 기다란 옷을 건 후 그 뒤에 옷처럼 숨는 방법이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작은 책장 하나로 꽉 찬 작은 방이었으니 엄마가 정말 나를 찾을 수 없었던 걸까 의문이 들지만, 나의 승률은 언제나 백퍼센트였다. 술래가 못 찾겠다고 기권을 선언하면 그제서야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시 게임의 룰이었다.

남편을 만나고부터는 이상하게 술에 취하면 숨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에는 난감해했다. 약간은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아님 말고). 그러다 점점 같은 행태가 반복되자 남편은 슬슬 짜증과 화가 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같이 술 마시던 상대가 나의 의사도 묻지 않은 상태에서 다짜고짜 없어진다고 생각해보시라.


신혼여행으로 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어느 낯선 동네에서, 가로수에서 떨어진 오렌지들이 나뒹굴던 코르도바의 미로 같은 골목에서 술에 취한 나는 또 나만의 숨바꼭질 세계로 빠져들었다. 코르도바에서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남편이 어디선가 숨어 자신을 기다리는 나를 내버려 둔 채 숙소로 향해 버렸다.

다음 날 술에서 깬 내가 술 취한 사람을 낯선 곳에 두고 어떻게 혼자 갈 수 있냐, 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 뻔했냐 추궁해도 남편은 니가 당하면 그런 말 못 할 거라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할 뿐이었다.


하긴, 나는 언제나 숨는 역할이라 술래의 고충은 잘 모른다. 더군다나 원하지도 않은 게임에 억지로 끌려와 아무리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쳐도 나올 생각을 안 하는 상대를 찾아야 하는 거라면 재미는커녕 열이 받긴 할 것 같다. 남편에게 숨바꼭질이란 술 취한 사람의 뒤치다꺼리로 각인이 되어 더이상 남편과는 숨바꼭질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요즘 나의 숨바꼭질 파트너는 세 살 난 아들이다. 숨바꼭질에 대한 열정의 온도가 얼추 맞는다. 또한 본인이 계속 술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어 계속 숨고만 싶은 나랑 잘 맞는다. 선호하는 숨바꼭질의 장소는 역시 우리 집이다.

기왕이면 한정된 방 안이 좋다. 옷장 안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책상 밑에 숨은 뒤 의자 위에 있는 가방이나 옷으로 나를 가리면 술래가 나를 정말로 찾지 못한다. 어렵지 않은 곳에 숨었다고 생각하는 데에도 단번에 찾지를 못하고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요즘 나의 숨바꼭질 파트너는 세 살 난 아들이다.
요즘 나의 숨바꼭질 파트너는 세 살 난 아들이다.elements.envato
 
역할을 바꾸어 숨어보라고 시키고 방 밖에서 기다리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 앞에 턱하니 서 있거나 이불 밖으로 몸은 다 내놓은 채 얼굴만 가리고 있다. "아니, 숨으라니까아" 하면 자기도 웃긴지 키득키득 웃는다.

긴장도가 약간 떨어지지만 뭐, 다른 선택지가 딱히 없다는 점, 그리고 긴장감 대신 귀여움을 한껏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만한 파트너가 없다. 서로 죽이 맞아 희희덕거리며 숨바꼭질을 해대는 우리를 보며 남편은 혀를 찬다. "너네 엄마는 참 숨바꼭질에 진심"이라며.

조금 더 큰 아이와 숨바꼭질을 같이 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뛴다. 그렇지만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숨는 역할을 독점하지는 못할 테지. 술래는 언제나 나의 몫이 될지도 모르겠다. 눈에 들어오는 아이의 발가락을 보며, 또렷이 들려오는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도 예전의 엄마처럼 혼신의 연기를 펼쳐야 하겠지.

아이가 정말로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에 꼭꼭 숨어버릴 수 있게 된다면, 숨바꼭질은 우리에게 대등한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아무래도 누가 누구를 봐주는 게임보다는 냉혹한 승부가 재밌는 법이니까.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그때가 되어도 아이가 나와 숨바꼭질을 해줄까. 그건 모를 일이지만 숨바꼭질에 대한 나의 진심이 식지 않을 때까지 아이와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 그럴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덧붙이는 글 추후 개인 브런치에 실릴 수도 있습니다.
#숨바꼭질 #아이와놀기 #놀이의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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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닌 지 10년, 아이를 키운 지는 3년이 되었고요,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와 더불어 살기 좋은 세상에 대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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