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린 지 1년 6개월 만에... 보스턴마라톤에 나갔습니다

[나는 러너입니다] 첫번째 이야기

등록 2023.06.16 13:28수정 2023.06.1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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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보스턴 이사가 결정되었을 때,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보스턴에 가면 가장 먼저 하고 싶거나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보스턴 시내에서 열리는 마라톤에 나가고 싶어."


나에게 미국은 정치면에 대통령 이름과 함께 가장 자주 언급되는 나라일 뿐이었다. 주요 도시의 특징을 섬세하게 파악하고 있지도 않았고, 어느 지역을 꼭 방문하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다.

우연히 시작하게 된 달리기

달리기는 아주 우연히 시작되었다. 싱가포르에서 스쿨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아이가 더이상 스쿨버스를 타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시내버스로 등하교를 해야 했다. 아침엔 내가 버스를 같이 타고 가서 데려다주고, 오후에는 입주 도우미가 데리고 오기로 했다.

시내버스 통학 첫날은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둘째 날은 '한번 걸어가 볼까?' 하는 마음이 들어 3.5킬로미터 거리를 걸어서 집에 왔다. 셋째 날, '내가 달릴 수 있나?' 하는 궁금증에 휩싸였고 걷다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이 나의 첫 동네 달리기의 시작이었고, 이후 줄곧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사방팔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안정적으로 3킬로미터를 달릴 무렵 트랙이 있는 운동장을 발견했고, 마치 운동선수가 된 것처럼 트랙을 반복해서 달렸다. 그 결과, 10킬로미터까지 수월하게 달릴 수 있는 체력을 구비할 수 있었다. 

코비드가 터지고 줄곧 홈트로 유명한 유튜버의 운동 영상을 보면서 매일 한 시간씩 맨몸 운동과 덤벨 운동을 했던 게 달리기의 기초 체력이 되었다. 달리기의 매력에 푹 빠져 한동안 달리기 관련 기본 자세나 추가 훈련을 소개하는 유튜버들의 영상을 찾아봤다. 그러다 운동화 브랜드에서 무료로 진행하는 달리기 수업에 참여해 사람들과 같이 정기적으로 달리기 훈련을 했다. 


달리기 수업에서 처음으로 사람들과 같이 뛰면서 느꼈다. 달리기는 혼자 하는 운동이지만 사람들과 같이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 에너지가 불끈 솟아오르고, 운동이 아닌 파티에 온 듯 즐거운 마음으로 달리기가 더 잘 된다는 것을. 그즈음 아주 막연하게 상상한 그림이 있었다. 바로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나의 모습이었다. 

보스턴으로 이사를 하고 한동안은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었다. 싱가포르는 사시사철이 여름이라 비가 오나 무더우나 운동화만 신고 나가면 그만이었는데, 겨울 달리기는 상상을 못 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봄을 기다리다 달리는 감을 잊을까 두려워 겨울용 러닝 재킷과 운동복을 몇 개 사고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눈만 오지 않는다면 달려 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사계절이 있는 곳에 왔으니 이곳 계절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야 진짜 달리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평소에는 동네에 있는 호수를 한바퀴 달리는데 그 거리는 7.5 킬로미터 정도이다.
평소에는 동네에 있는 호수를 한바퀴 달리는데 그 거리는 7.5 킬로미터 정도이다. 김보민
 
겨울 달리기는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다. 1킬로미터를 달리면 몸이 풀린다. 3킬로미터를 달리면 온 몸에 피가 돌며 손가락 끝도 따뜻해진다(수족냉증이 있는 사람에게 손끝, 발끝 추위는 아주 고통스럽다). 4킬로미터에 접어들면 지면에 닿는 발과 그 발을 지지하는 발목에 안정감이 느껴지고, 경쾌하게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6킬로미터 무렵부터는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난 것처럼 미끄러지듯 달리게 된다. 

이때부터 무념무상이 시작된다. 세상에 세 가지 소리가 존재한다. 내 발바닥이 지면을 차고 나갈 때 내는 소리, 리듬감 있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 저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들이 만드는 소리. 이보다 더 멋진 비지엠(BGM)이 또 있을까 할 정도로 눈물겹게 행복한 순간이다. 
 
 가끔 신나게 달리다 호수를 보고 있으면 이 호수를 보러 미국에 온 건 아닌가 할 정도로 행복하다.
가끔 신나게 달리다 호수를 보고 있으면 이 호수를 보러 미국에 온 건 아닌가 할 정도로 행복하다. 김보민
 
10킬로미터 달리기에 자신감이 생긴 어느 날이었다. 또다시 우연히 5월에 보스턴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찾았고, 10달러 할인까지 받고 조기 등록에 성공했다(누구나 다 아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매년 4월에 열리고, 풀 마라톤 기록이 있는 사람만 참가할 수 있고, 나이대별로 합격 시간대가 있기에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라 할 수 있다). 10킬로는 안정적으로 달리니 첫 대회는 다소 공격적으로 21.095킬로미터를 달리는 하프 마라톤에 참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10킬로미터 이상 달리는 연습을 시작했다. 

생애 첫 보스톤 마라톤 대회
 
 드디어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드디어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김보민
 
대회 당시에는 7천 명 가량이 모였는데 앳된 학생부터 70대 이상의 어르신까지 참가자의 연령은 아주 다양했다. 함성과 함께 기록이 좋은 사람들이 먼저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내 차례가 되어 대열을 따라 달렸다. 

아침 7시 대회라 전날 밤잠까지 설쳤지만, 저녁내내 열심히 한 스트레칭이 도움이 되었던지 시작부터 다리 움직임이 좋았고, 같이 달리는 사람들 에너지가 느껴져서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았다.

이 많은 사람이 모두 달리기 하나를 위해 이곳에 모여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린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찡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게다가 이런 대회가 처음이라 마치 내가 진짜 마라토너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황홀할 지경이었다.   

대회 목표는 단순했다. 다치지 않고 욕심내지 않기, 급수대에서 물 잘 챙겨 마시기, 완주하기, 조금 더 할 수 있다면 2시간 30분 이내로 들어오기! 

보스턴 씨포트에서 시작해 찰스강변을 달려 하버드 대학 인근까지 갔다가 반환점을 돌아 보스턴 퍼블릭 가든을 지나 씨포트로 들어오는 경로였다. 생각보다 오르막 구간이 자주 등장했고, 그럴 때마다 우리 동네 오르막을 아주 힘겹게 달렸던 날들이 떠오르며 그 경험이 헛된 게 아니라는 생각에 뿌듯했다. 

두어 번 급수대에서 나눠주는 물을 마시고는 이내 요령이 생겼다. 물만 두 잔 연거푸 마시기보다 이온 음료를 먼저 한 잔 마시고 물을 마시며 입을 헹구는 게 도움이 되었다.

마라톤 대회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달리면서 사진도 곧잘 찍는데 난 핸드폰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핸드폰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정석대로 그저 앞만 보고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력으로 달리기만 했다. 

10킬로미터 반환점을 돌고 내 주변 사람들이 한번 물갈이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보다 빠른 속력으로 치고 나간 사람도 있고, 뒤로 빠진 이들도 있었고, 걷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작 무렵 나의 목표 평균 속력은 킬로당 6분 30초였는데, 생각보다 더 빨리 달려 6분 18초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으로 반이 남은 시점, 체력 분배가 중요하겠다 싶었고, 내 호흡에 집중했다. 

들이쉬는 숨보다 내쉬는 숨이 많아야 숨이 차지 않는다. 코로 들이쉬고 입으로 내쉬는 숨과 내 발 움직임의 박자를 맞췄다. 속력을 미리 세팅하고 달리는 트레드밀 위에 있는 느낌으로 호흡으로 속력을 조정한 셈이었다. 

15킬로미터 구간에 접어드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보스턴 찰스 강변에는 오래된 건물이 많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건물들의 꼭대기를 눈으로 연결하며 도시의 밑그림을 내 머릿속에 그렸다. 가족을 응원하러 나온 어린이들과 대회를 관리하는 경찰들과 하이 파이브도 했다. 이제 마라톤 대회를 제대로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괜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달리면서 찍은 단 한 장의 사진
달리면서 찍은 단 한 장의 사진 김보민
 
마지막 구간은 보스턴 퍼블릭 가든 근처였는데 오르막이 자주 등장해 앞 허벅지가 터져나갈 것 같았고, 산등성이 같은 오르막을 가까스로 달린 후 평지를 달리면 다리가 내 몸과 따로 노는 느낌이 들었다. 

다리를 하나 건너자, 결승점이 보였고,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달렸다. 2시간 17분 39초 기록으로 완주 했다. 결승지점에서 기다리는 남편과 아이들 얼굴을 보고 울컥했다. 완주했다는 기쁨과 21킬로미터 정도는 단박에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하프 마라톤 여정, 지도를 보다 그 날의 열기와 기쁨을 다시금 느낀다
하프 마라톤 여정, 지도를 보다 그 날의 열기와 기쁨을 다시금 느낀다김보민

목표 없이 시작한 달리기를 하프 마라톤 완주로 1막을 장식했고, 1년 6개월의 달리기 여정과 하프 마라톤 완주에서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나이 마흔에 시작한 달리기에서 새로운 종류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요즘이다. 다음 글에서는 하프 마라톤을 뛰고 배운 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마라톤 #러너 #달리기 #보스턴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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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에 자리 잡은 엄마, 글쟁이, 전직 마케터. 살고 싶은 세상을 찾아다니다 어디든지 잘 사는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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