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백범기념관 벽에 좌우로 나란히 걸려 있는 이상룡, 이승만 사진.
백범기념관
1920년을 전후하여 임시정부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의 주장은 대체로
첫째,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같은 외교적 활동론.
둘째, 안창호 등의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배양하고 준비하자는 실력양성론.
셋째, 이동휘·박용만 등 즉각적인 독립투쟁을 주장하는 무장투쟁론으로 분류되었다. (주석 1)
미국에 망명 중이던 이승만은 정한경과 함께 3.1혁명 직전인 1919년 2월 25일 대한인국민회 명의로 윌슨 미국대통령에게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다. 다음은 청원의 주요 부분이다.
오인은 자유를 사랑하는 2천만의 이름으로 각하에게 청원하노니 각하도 평화회의에서 오인의 자유를 주창하여 열석한 열강으로 하여금, 먼저 한국을 일본의 학정에서부터 탈출하게 하여 장래 완전 독립을 보증하게 하고 당분간은 한국을 국제연맹 통치 밑에 두게 할 것을 빌며, 이렇게 될 경우 대한반도는 만국 통상지가 될 것이며, 그리하여 한국을 극동의 완충국으로 혹은 1개 국가로 인정하게 하면 동아대륙에서의 침략정책이 없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동양평화는 영원히 보전될 것이다.
공식으로 세계대전에 참가할 수 없었던 국가를 위해서 이와 같이 해주는 것이 어려운 일인 것을 우리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인민도 전쟁시에 수천 명의 청년이 러시아의 의용군으로서 연합군을 위해 종군 출전하고, 또 미국에 제류하는 한인 등도 자기의 적성과 역량에 따라서 공화원리를 위하여 인력과 재력을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미국 선교사와 상업상과의 관계에 대하여서도 미국에서 한국의 정상과 같이 등한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한국 이민 등에 미국에서 한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한·미조약을 잊은 일이 없고, 한국인 등은 미국의 동정을 배반한 하등의 행위를 한 일이 없다.
미국은 이와 같이 민족 자결주의를 가진 한인을 원조할 의무를 가진 외에도 또 하나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미국 자체의 권리와 이익을 위하여서도 일본이 극동에서 침략한 것을 등한히 생각할 수 없고, 또 자유를 사랑하는 2천만 한인으로 하여금 시대착오적 국가의 속박을 받게 하는 것은 민주정책주의 안전에 발전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영원한 평화를 창조하려는 각오의 그 근본 대지가 발달한 모든 국가의 갈망을 만족하게 할 것으로 믿으며, 이 대지는 평화회의에서 모든 것을 규정하는 데에 모범이 될 것이다. 이 대지 속에 한인을 위한 국가적 갈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것이다.
오인이 간절히 바라는 바 각하께서 잘 알선하여 한국 인민으로 하여금 천부의 자유를 구유하게 하고, 한국 인민으로 하여금 자기가 원하는 정부를 자기가 건설하여 그 정부 밑에서 생활하게 하도록 해 주기를 바람.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
(주석 2)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은 임시정부가 개원하여 내각을 구성하기 위한 임시의정원 첫 회의 (1919년 4월 11일)에서부터 그를 국무총리로 선임해서는 안되는 이유로 제기되었다. 이것은 이상룡을 비롯하여 무장투쟁론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기도 했다.
의정원회의에서 신채호는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자이다."라고 성토하고 "전자(前者)에 위임통치 및 자치문제를 제청하던 자이니 그 이유로서 국무총리로 신임이 불가능하다." (주석 3)고 주장하며 회의장을 떠났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은 미국의 주요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윌슨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힘써 줄 것을 요청했으며, 동시에 국제연맹이 한국을 '완전한 자치 통치에 적합하다'고 인정할 때까지 다른 나라가 위임통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의 사본이 정한경과 함께 미국에 온 대한인국민회의 사절인 이승만에 의해 오늘 여기에 공개된다. (주석 4)
독립운동에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승만과 정한경의 위임통치 청원은 여간 힘빠지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내에서 일부 인사들의 자치론 역시, 절대독립을 주창해온 이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굴종적이었다.
임시정부 외무총장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차 유럽에 나가 있을 때에 그곳 사람들이 그를 조소하면서 "왜 한국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을 위임통치하여 줄 것을 청원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는가?(주석 5) 라고 물어왔었다고 한다.
주석
1> 이정식, <한국민족주의와 정치학>, 178~179쪽 발췌, 한밭출판사, 1982.
2> <독립운동사자료집(9)>, 510~512쪽, 독립기념관, 1987.
3>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문서>, 40쪽, <임시의정원기사록, 제11회집>, 1919.
4> <뉴욕 타임즈>, 1919년 3월 17일치.
5> 이정식, 앞의 책, 198쪽.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