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이항증
이상룡이 만주 화전현에서 재기를 도모하고 있을 즈음 어느 날 서로군정서의 헌병대장이었던 성준용이 찾아왔다. 미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이승만과 대립, 중국으로 온 박용만이 신숙 등과 함께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려는 데 이상룡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전갈이었다. 이들의 주장에는 많은 부분에 동감하여 베이징으로 갔다.
1921년 4월 17일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가 열렸다.
그곳에 모인 인물들은 국내외의 대표 자격을 갖게 되었는데, 국내 국민공회 대표로는 박용만, 하와이 국민군 대표 김천호, 국내 광복단 대표 권경지, 하와이 독립단 대표 권승근·김현구·박건승, 국내 조선청년단 대표 이광동·이장호, 소련 대한국민의회 대표 남공선, 국내 노동당 대표 김갑, 국내 통일당 대표 신숙·황효수·신달모 등이었고, 서간도 대표로는 이상룡이 데려간 송호가 참석하게 되었다. 이들은 며칠간의 회의를 거쳐 군사통일회의 명의로 '조국의 독립은 군사운동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고, 군사의 통일이 없으면 군사운동의 성공은 어렵다'라는 합의된 선언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주석 1)
군사통일회의는 군사통일 문제를 중점적으로 토의하고, <선언서>와 <성토문>을 채택하였다.
군사통일회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① 상하이에 있는 극소수 사람의 사심으로 조직되어 국내 국민대회에서 조직한 한성정부를 무시하고 국내외 동포의 의사를 무시한 점과 대미위임통치를 청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계속 그 수령의 지위에 있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부정당·불공정하고, ② 성립 이래 열거할만한 성적이 없을 뿐 아니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에 무성의한 타협을 하였으며, ③ 각 시설에 자신의 사당(私黨)을 부식하여 거국일치의 민심을 분열시켰으며, ④ 이승만이 대미위임통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절대 옹대하여 외적으로 국가의 체면을 불고(不顧)하고, 내적으로 민족의 정신을 현혹케 한 점을 들었다.
또 임시의정원에 대해서는 ① 가급적 널리 국내외 동포의 의사를 채집하지 않고 극소수인 으로써 대표를 구성한 점, ②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안창호를 내무총장으로 임명한 점, ③ 한성정부를 무시하고, 대한국민의회에 대하여도 사기적 교섭을 한 이유로 불승인하였다. (주석 2)
북경군사통일회의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불만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위임통치론자를 수반으로 옹립하고, 무장항일전에는 소홀히 한다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별도로 베이징에서 '조선공화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에 이상룡을 추대하는 등 조각을 하였다.
군사통일회의는 1921년 10월경 상하이의 임시정부에 다음과 같은 항의문을 보냈다. ① 아당(我黨)은 조선공화정부를 베이징에 창설할 것,② 아당은 대조선공화정부 창설 후 절대로 상하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한다. ③ 아당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의견을 들은 후 조선국민에 선포할 것을 결의한다. 항의문의 내용대로 군사통일회의는 1921년 11월경 베이징에서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를 조직하였다.
조선공화정부의 각원은 대통령 이상룡, 국무총리 신숙, 외무총장 장건상, 학무총장 한진산, 내무총장 김대지, 재무총장 김갑, 군무총장 배달무, 교통총장 박용만이었다. 그런데 조선공화정부는 조직은 되었지만, 제대로 수립되지 못하였다. (주석 3)
주석
1> 채영국, 앞의 책, 178~179쪽.
2> 김성민, 북경군사통일회의, <한국독립운동사사전(4)>, 654쪽, 독립기념관, 2004.
3> 앞의 책, 6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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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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