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 이상룡 선생.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때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석주 이상룡 선생.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때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 기념사업부 홈페이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들은 박은식이 하야하면서 후임자를 물색하였다. 개헌을 통해 바뀌게 된 내각책임제의 수반이다. 권력은 많이 분산되었으나 정부수반의 위상인 것이다. 비록 외국 조계의 일우에 자리잡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한민족의 대표적 정부기관임에는 사실이다.
임시정부는 그동안 일제로부터 갖은 압력과 내부적으로 갈등, 분파, 이탈 등 많은 시련을 겪었다. 이같은 현상으로 국민의 기대도 전과 같지 않았다. 이래저래 지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구성원들의 인화와 이탈자들의 재결합이 요청되었다. 새로 통령이 되는 인물이 해야 할 책무였다.
새 헌법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國務領)제로 바꾸었다. 권력분산의 내각책임제 형태였다.
국무령이라는 명칭이 결정되기까지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헌법개정 초안에는 '국령(國領)'이었는데, <독립신문>이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국령'은 '나라의 수령'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라의 영토'라고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나라의 공복(公僕)'이라는 뜻에서 '국복(國僕)'이라고 하든지 '국무령(國務領)'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나라의 원수를 칭하는 직명에 종이나 노예를 의미하는 '복(僕)' 자를 쓸 수 없다고 하여 국복은 배제되고, 국무령으로 결정되었다. (주석 1)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들은 '국무령'에 적합한 인물을 물색하였다. 임시정부의 변신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새 지도자의 상징성이 그만큼 중요했다. 회의를 거듭한 결과 이상룡이 천거되었다.
만주에서 흩어진 독립군 부대를 다시 모아 새 단체를 조직하고 있던 이상룡은 의정원이 자신을 국무령에 추대했다는 소식을 전보를 통해 알았다. 그리고 곧이어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내무총장 이유필과 법무총장 오영선이 찾아와 이 사실을 전하였다. 이에 앞서 하야를 천명한 박은식으로부터 이와 관련한 서한을 받았다. 첫 편지는 받지 못했는데, 다시 두 번째 서한을 보내었다.
다음은 이에 대한 이상룡의 답신 중 후반 부문이다.
또 직책을 얼토당토 않은 부적격자에게 넘겨주는 것은 마치 태양의 밝은 빛을 철거하고 횃불에게 빛을 빌리는 격입니다. 남에게 사양하는 것은 비록 미덕이라 하겠으나 여론의 낙망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 상룡은 산야의 졸렬한 인품으로 재주가 모자라고 학식이 일천한 데다 더욱 정계에 대해서는 평소 견문이 전혀 부족합니다.
지난날 만주에서 서로군정서의 직책을 맡았을 때는 책임이 단순한 데도 시위소찬을 면치 못했는데 하물며 요즘 와서 더욱 쇠약해져서 신체나 정신력이 전혀 딴 사람처럼 됨이겠습니까? 이러한 처지로 어찌 감히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 나아가 망령되이 온 나라 국민들에게 죄를 짓는 일을 자초하겠습니까?
전보가 도착하던 날 안합(顔闔)을 본받아 도망가고자 하다가 일의 중대함에 비추어 지우 여러분께 감히 의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제도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꾸려는 이때 한결같이 회피만 일삼는 것은 특히 원만한 해결을 함께 도모하려는 뜻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진퇴양난에 빠져 사정이 크게 군색하게 되었는데 일전에 의회에서 취임을 재촉하는 전보가 당도하였기로 부득이 출발하겠노라고 답해 보냈습니다.
그러나 두꺼운 낯에 염치는 있어 합하께는 무어라고 사례하여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불가서(佛家書)의 비유를 빌리자면 진실로 '정신 수양과 질병 퇴치의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겠으나, 지금 상해의 풍파가 점점 세차게 몰아치는 것을 보아하니 아시아 전체가 장차 앞을 예견할 수 없는 형국으로 치달릴 것이니 우리 해동 사람에게는 아마도 지금부터 일이 많을 것입니다.
생각건대 집사께서는 연세 높은 때에 일을 마쳤으니 일신에 부담이 될 책임은 없을 것이나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던 분이 능히 속세의 먼지에서 벗어나시면 좌선하시다가 정계(定界)에 들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내내 도체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주석 2)
주석
1>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 68쪽, 한울, 2021.
2> <석주유고(상)>, 371~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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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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