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간을 살아도 기억하는 과거는 다르다

싱아를 보지 못한 나와 수숫대를 모르는 아이들

등록 2023.06.23 10:32수정 2023.06.2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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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보면 싱아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시골에서 이사를 온 작가가 서울 아이들이 아카시아꽃을 포도송이처럼 들고 먹는 모습을 보고 따라 했다가 비릿하고 들척지근한 맛에 헛구역질을 느끼며 시골에서 먹었던 싱아를 떠올리는 장면에서다.


작가는 싱아를 시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풀로 찔래꽃이 필 무렵이면 줄기에 살이 오르고 연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싱아의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아카시아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데 제격일 거 같다는 말을 한다.

글을 읽다 싱아가 어떻게 생긴 풀일지 궁금했다. 시골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면 내가 한 번쯤은 봤을 만도 한데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서다. 컴퓨터를 열어 검색창에서 싱아를 친 후 설명을 읽어보고, 이미지를 살폈다. 알 수가 없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며칠 전 수업을 하다 이때 내가 느꼈던 기분을 아이들이 느끼고 있는 걸 확인했다. 아이들에게 수수를 설명할 때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내 어린 시절에는 연한 수숫대를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수숫대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하겠다는 듯 멀뚱거렸다. 

"수수를 몰라? 왜, 있잖아.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호랑이가 떨어져서 빨갛게 변했다는 그 곡식. 그림책에서 수수 그림 못 봤어? 마트에서도 수수는 파는데."
"이야기는 알겠는데 수숫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럼, 옥수수는 알아? 수숫대는 옥수숫대보다 잎과 줄기가 조금 더 날씬한 편인데."


수수의 줄기가 옥수수와 닮았다고 해도 고개를 저었다. 급기야 검색을 해서 이미지를 확인시켜 줘도 '아~' 하는 반응은 없었다. 도통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싱아를 짐작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옥수수니, 수수니 하는 곡식의 열매와 그 몸체를 연결 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여긴 것들을 아이들이 알지 못했을 때 느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다. 나의 가까운 과거가 그들에겐 아득하게 먼 과거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이 되어서다. 아이들은 내가 6.25 때 태어난 것이 아니냐며 수숫대 씹어 먹은 경험을 몽실언니 식모살이하던 때로 여겼다.

나의 경험은 80년대의 일이고, 지금과는 거리상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인데도 말이다. 6.25가 일어났던 50년대와 비교하면 발전의 정도에 확연한 차이가 나는데, 아이들은 그 시기조차 머나먼 과거로 인식했다. 그들에겐 50년대나 80년대나 멀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렇듯 과거를 이야기할 때면 과거가 나를 오래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현실과 종종 마주한다. 나의 과거가 현재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동그마니 나동그라진 것을 보면서 말이다. 그래서 요즘처럼 한참 수박을 먹을 때면 떠오르는 원두막의 추억은 고이 접어 머릿속 한 귀퉁이에 넣어두곤 한다. 그것 역시 아이들에겐 교과서 속에서나 한 자리 차지할 만한 옛날의 이야기일 테니.

수숫대를 먹던 그 시절, 나는 할머니와 함께 인간 CCTV가 되어 원두막을 지키는 파수꾼 노릇을 한 경험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랐구나 싶어 섬뜩한 기분이 들지만, 그 당시에는 할머니만 있으면 수박이나 참외를 서리하러 오는 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 어두운 밤 플래시(flash, 랜턴) 하나에 의지해 마을과 동떨어진 논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외딴 원두막에서 겁도 없이 수박이며 참외를 지킬 생각을 했지. 아니면 이름마저 예쁜 서리를 도둑질이 아닌 손님 방문 정도로 생각했다거나.

이제 수숫대를 잘근잘근 씹어대던 일이나, 어둠의 장막을 뚫고 시원하게 풍겨운 참외의 달큰함은 어쩌다 꺼내 먹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다른 추억거리를 꺼내 먹을 때는 잊고 지내기도 하면서. 하지만 과거는 언제나 아련함으로 미소를 데리고 온다. 점점 높게 쌓여가는 과거의 탑이 공든 탑으로 무너지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먼 훗날 지금의 아이들이 자신의 과거 속에서 무엇을 꺼내 먹을지가 궁금해졌다. 그들의 과거도 아련함으로 미소를 손잡고 올까? 바라건대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현실이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면 그런 과거에 의지해 한 번씩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꺼내 먹을 거리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비록 자신의 다음 세대가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것이냐고 비웃어도 그 과거로, 추억으로 그렇게 웃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풍요롭지 않은 시대를 살았던 내가 지금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니까.

요즘은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한다. 그런 빠름 속에서 아이들이 기억으로 남을 만한 것을 잡아낼 수 있을까 염려도 된다. 하지만 박완서 작가의 싱아가 나의 수숫대로 이어지듯 그들만의 무언가로 이어지리라 믿는다. 그것이 그들을 미소짓도록 만들어주길 간절히 바라 본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렸습니다.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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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학원을 운영하며 브런치와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쓰기 보다 읽는 일에 익숙한 삶을 살다가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썼습니다. 신문과 책으로 세상을 읽으며 중심을 잃지 않는 균형 잡힌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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