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 유묵으로 『석주유고』의 초(草)다.
박도
석주 선생의 아들 준형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아버지를 모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석주유고>를 포함한 그의 유고는 아들의 노력으로 보존·집합되었다. 곁에서 지켜본 부친의 모습이다.
부군은 풍채가 의젓하고 기국(器局)이 크고 깊었다. 성품·도량은 관대하고 온화하면서도 엄하고 굳세었으며, 의지는 곧고 확실하면서도 고체되지 않았다. 총명하고 식견·사려가 있어 일을 당하면 능히 앞일을 예견하고 먼 장래를 헤아렸으며 번극한 것을 다스리되 어리접지 않고 위태로움에 임하여도 두려워함이 없었다. (주석 9)
석주 선생의 <행장>을 쓴 권상규의 기록이다.
밝고 고요함을 치심(治心)의 핵심으로 삼으니 사물을 두루 원활하게 비추어보게 되었고, 공손함과 장중함을 몸가짐의 요점으로 삼으니 기상이 모나지 않고 평실해졌다. 의지는 확고부동하여 선을 따름에 있어서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고, 근졸(謹拙) 함을 법도로 삼으니 도량이 절로 크고 두터웠다.
그러므로 정신을 모아 묵묵히 앉아있을 적에는 외관이 엄숙하여 멀리서 바라봄에 감히 범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지만, 사람을 접할 적에는 그 표정과 말씀에 마치 봄바람이 이는 듯하여 사람들이 편안해 하였으니, 여기에서 바로잡고 변화하는 공부가 내면에 쌓이어 충신하고 인후한 덕이 외면에 나타난 것을 알 수 있겠다. (주석 10)
옛 사람을 그릴 때(쓸 때) 난감한 경우가 체구나 기질·말씨 등이다. 여러 가지 행적은 자세히 나타나지만 정작 중요한 인물의 신체구조에 관해서는 소홀한 편이다.
부군은 체구는 작으나 음성은 우렁차고 수작은 조용하고 느릿하였다. 앉으면 응결된 것 같고 서면 꼿꼿이 세운 것 같으며, 걸음걸이는 단정하고 침착하였다.
큰 일을 경영할 적마다 반드시 묵묵히 요량하고 마음 속으로 헤아린 뒤에 의견을 참작 채택하고, 이미 정해지고 나서는 일찍이 동요되어 고친 적이 없었다. 비록 뜻밖의 장애가 있더라도 일찍이 뒤에 뉘우치는 일이 없었다. (주석 11)
아! 군자가 배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고, 도(道)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때에 따라 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성과 교정의 공부가 오래 되었으되 기질의 치우침이 보이지 않게 되고, 조년(早年)과 만년의 출처가 달랐으나 상도(常道)와 권도(權道)의 합당함을 잃지 않는 이는 오직 선생뿐일 것이다. (주석 12)
석주가 신흥무관학교건 주민자치단체건 이끌어가는 데 잡음이 일지 않고 지도자나 청년들이 그를 따른 것은 한쪽에 편중되지 않은 개방적이고 폭 넓은 사고에 기인한 바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