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 생가인 경북 안동 임청각. 임청각 복원을 위해 일제시대 설치되어 최근까지 기차가 오가던 철길 해체 공사가 한창이다.
권우성
석주 이상룡 선생은 선각자였다. 기득권을 버린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안동 지역의 뿌리 깊은 보수유림의 고루한 외투를 벗어던지고 맨 먼저 혁신유림의 기치를 들었다.
시대의 징후를 예감한 파격의 의식세계 쇄신이었고 확장이었다. 이상룡은 척사와 의병전쟁의 근왕주의적 관계, 애국계몽운동론과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근대화론자들의 한계, 민족해방운동 노선에서 외교론과 실력양성론의 부르주아적 안이성 등 당대의 주요 민족담론들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꿰뚫어보면서 시대적 상황의 리얼리티에 바싹 다가간 인물이었다. (주석 6)
일제강점기 민족해방 투쟁의 방법론에서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에 비해 무장전쟁론은 의열투쟁과 함께 가장 어려운 분야이고 그만큼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다. 앞의 두 가지 방법이 비교적 안전지대에서 활동이라면 뒤의 방법은 적진에서 또는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이어서 그만큼 위험이 따랐고 실제로 희생자가 그만큼 많았다.
석주 선생은 시종 의병전쟁으로부터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그의 선각적인 투쟁에는 가족, 일가, 친족이 함께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이상룡과 일가는 모두 고난의 길을 같이했다. 그의 종숙인 승화와 두 동생 상동·봉희, 외아들 준형, 사위 강남호, 조카 형국·운형·광민·광국, 손자 병화 등과 친·인척 50여 가구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고향땅을 등졌다. 비슷한 시기에 이회영 6형제도 압록강을 건넜다.
이상룡은 안동 전통 명가의 종손이다. 가까이로 한말 경북지역 의병의 선두에 섰던 서산 김흥락이 스승이었고, 성일 권세연은 그의 외삼촌이며, 의병대장 왕산 허위는 석주의 아들 준형과 사돈 간이다. 처남 백하 김대락과 월송 김형식 부자, 그리고 일송 김동삼은 만주 망명길에 같이 오른 평생 동지로서 모두 조국의 제단에 순국한 이들이다. 애국시인 이육사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고모가인 이상룡의 고택 임청각을 드나들며 많은 훈도를 받았다. (주석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