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집배원 박창용씨
월간 옥이네
박창용(67)씨는 20대 초반부터 9년 전 퇴직하기까지, 안남우체국에서 36년간 집배원으로 근무했다. 안남우체국의 시작을 옆에서 바라보았고 한때 직원으로, 퇴직 후에는 고객으로 함께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안남우체국의 역사다.
"우체국 오기 전에는 잠깐 서울서 숟가락 만드는 공장에 다녔어요. 그런데 서울 온 지 한 달도 채 못 됐을 때, 어머니가 직접 서울에 올라오셔서 고향에 다시 가자고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안남우체국에 집배원 자리가 생겼다는 거였죠."
어머니 손에 이끌려 부랴부랴 고향에 돌아온 1978년 11월. 그렇게 박창용씨의 집배원으로서의 인생이 시작됐다. 동료 집배원 두 사람 역시 동네 이웃이었는데, 이들 앞으로는 경찰 제복을 닮은 남색 유니폼에 갈색 우편 가방, 빨간 자전거가 놓였고 그는 곧 안남면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그는 매일 아침 7시부터 할당 우편물을 다 전하기까지 안남면 구석구석 마을을 다녔다.
"1980년 대청댐 생기기 전에는 안남면 행정구역이 지금보다 넓었어요. 안내면 오덕리나 옥천읍 오대리도 그때는 안남면이었지요. 두 군데가 멀어서 제일 다니기 힘들었어요. 오덕리는 또랑 하나를 경계로 보은(삼승면 원남리)과 구역이 나뉘었을 정도니까요."
오덕리와 오대리는 현 도로를 이용해도 자전거로 1시간가량 걸리는 거리(약 15km)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던 당시에는 지금보다 상황이 더 어려웠을 터. 오덕리에는 신생약방, 방앗간 등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가게가 있었기에 우편물이 많았고, 박창용씨는 거의 매일 이곳으로 향했다. 드링크류를 제외한 의약품 운송도 집배원의 몫이었다.
"오덕리는 자전거 대신 버스 타고 다니곤 했어요. 먼 데다 짐도 많았으니까요. 옛날에는 버스들이 집배원 보면 돈 안 받고 그냥 태워줬죠. 지나가던 차들도 멈춰서 '어디까지 가시냐'면서 데려다주시고요."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 안내원이 있고 도로에는 차가 드물던 시절이다. 오대리로 향할 때는 연주리 피실 선착장에서 배를 탔다. 겨울에 호수가 얼면 직접 걸어 들어가 배달하거나 마을로 향하는 주민들의 손에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때도 있었다. 우편물은 신문 혹은 고지서가 가장 많았고 편지나 경조사를 알리는 전보, 소포도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우편물이 가장 많던 때는 대청댐이 들어서기 직전이다. 수몰이 예정된 마을주민들에게 토지와 주택 보상 관련 우편물이 전해졌던 것. 집배원 일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우편물이 수북하게 쌓였다. 그에게도,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해 들은 주민들에게도 가장 괴로운 시기였을 테다.
"그땐 너무 힘들더라고. 편지나 좋은 소식 전해줄 때는 주민들도 반가워해요. 고지서나 좋지 않은 소식 담은 전보 전해줄 때는 나도, 받는 이도 별로 달갑지 않았지."
밤늦게 전보를 전하거나, 눈빗길에 때로는 미끄러져 넘어지는 일도 있었다. 몸이 고되고 일하는 강도에 비해 보수도 박했지만(첫 월급 4만7500 원),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일을 다 마친 뒤에는 동네 또래들과 강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뛰어나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나 몰라. 그땐 나도 20대였고 어렸으니까 가능했던 일일 테죠."
박창용씨의 일상 풍경은 하루하루 바뀌었다. 대청댐이 생기며 몇몇 마을이 사라졌고, 1984년 무렵부터는 집배원들에게 운송수단으로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가 제공됐다. 비포장도로는 평평한 포장도로로 변했고 사람들을 울고 웃게 했던 전보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가정집마다 전화와 컴퓨터가 놓이면서 우편물 중에 손편지를 찾아보기란 어려워졌다. '체신의 날'이라 부르며 집배원들이 하루 쉬며 놀던 날도 어느 순간부터는 '정보통신의 날'로 불리기 시작했다. 20대의 젊은 청년이던 박창용씨 역시 어느덧 장성한 자녀를 둔 중년이 돼 있었다.

▲박창용씨가 집배원으로 근무할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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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과 함께 찾아온 폐국 위기
마을에 뒤숭숭한 소문이 들려온 것은, 박창용씨가 퇴직을 앞둔 시점이었다. 안남우체국이 폐국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었다. 2017년 초 안남 별정우체국장이 개인 파산 선고를 받으면서 폐국 가능성이 높아졌고 마을은 큰 충격에 빠졌다. 오래전부터 안남면을 지탱해오던 든든한 가문이 위태롭게 된 데다 주민 편의에 꼭 필요한 시설이 사라진다면 일상생활에도 타격이 크기 때문이었다. 결국 개인 파산이 확정되면서 기존 별정우체국 건물은 압류, 안남우체국은 존폐의 갈림길 앞에 섰다.
"당시 주민들이 많이 힘들어했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도 있었고 마을 분위기가 좋지 않았어요. 이러한 상황에 마을 우체국마저 사라진다면 주민들의 상실감은 더욱 심해졌을 테죠. 어떻게든 우체국을 살리고 싶어했어요. 전화나 인터넷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택배를 보낸다거나 우편물을 보낼 때, 금융업무를 할 때면 필요한 게 우체국이니 말입니다."
김대영씨는 폐국 위기 당시를 회상했다. 별정우체국 경영수지가 적자인 상황에서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폐국되는 것이 당연했지만, 주민들 사이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그 대안으로 민간 우편취급국 위탁 혹은 일반우체국으로 전환하는 방법이 등장했다. 우편취급국으로 전환될 경우 그 지위가 강등돼 금융업무를 볼 수 없고 우편·택배 업무가 축소된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에 일반우체국 전환은 모든 기능이 유지되고 기존보다 공공성이 높아지는 것이기에, 가능한 최선의 결과였다.
주민들과 안남면 여러 단체는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안남면 이장협의회에서는 '일반우체국 전환을 위한 주민 서명 운동'을 벌여 주민 500여 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안남면 인구가 1500명이 채 되지 않으니 전체 주민 중 3분의 1에게 서명을 받아낸 셈이다.
주민들이 움직이자 행정·정치 영역에서도 협조가 이어졌다. 당시 신강섭 옥천군 부군수, 박덕흠 국회의원 역시 일반우체국 전환을 위해 충청지방우정청 측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협상에 나섰다. 곧 우정청에서 '지자체가 부지와 건물을 제공할 경우 일반우체국 전환을 고려하겠다'는 답변이 왔고 안남면사무소는 일부 공간을 우체국부지로 내어주는 것에 동의했다.
숨 가쁜 논의를 끝으로 제비가 날아들던 2017년 5월 8일. 마침내 지금의 안남우체국이 생겨났다. 폐국 논의가 시작된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따로 개국 행사를 열어 마을 주민들이 다같이 축하했지요. 무언가 함께 해냈다는 기쁨에 떠들썩했습니다."
전국에서 이처럼 폐국 위기를 극복하고 일반 우체국으로 전환한 사례는 없었다. 이전까지는 경제성 악화로 별정우체국이 문 닫을 경우, 별다른 대안 없이 폐국되는 것이 일반이었다. 안남우체국은 민·관과 우체국이 소통하며 '공간 공유'를 통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범 사례로 우정사업본부 내에서 평가받고 있다.
빨간 제비, 영원하길

▲충북 옥천 안남우체국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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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지켜낸 만큼 더 소중한 안남우체국이다. 수익 창출 측면에서만 보았다면 벌써 문을 닫아야 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 의미를 생각할 때 안남우체국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주민들은 안남우체국을 바라볼 때마다 지난 일들을 떠올릴 테다. 함께 웃고 울었던 기억, 그를 통해 전해 들었던 수많은 소식, 치열했던 젊은 시절을 말이다. 동시에 그것이 여전히 깨끗한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위안을 받을 테다. 물론 종종 방문해 택배를 접수하고, 우편물을 보내고, 금융업무를 볼 수도 있다.
지난해 12월, 새마을금고 안남지점(안남면 연주리)이 문을 닫은 이후로 마을 금융기관으로서 안남우체국의 위치는 더욱 중요해졌다.
"안남우체국의 존재가 실질적으로도 큰 도움이 돼요. ATM 기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기계 조작이 익숙지 못한 어르신들에게는 '있으나마나'예요. 다른 금융기관으로는 농협뿐인데, 그마저도 이전에는 안남농협이었다가 안내·안남농협, 대청농협으로 합병된 상태죠. 안남 지점으로 이름이 남은 건 우체국뿐인 거예요."
김대영씨의 말대로 새마을금고 안남지점 앞에는 지점폐쇄 안내문이 붙어 썰렁한 분위기가 감돈다. 박창용씨는 여전히 '임대'라 써 붙인 옛 안남우체국 건물 앞을 지나 걸어가며 말한다.
"그래도 우체국 덕분에 내가 지금껏 식구들 먹여 살리며 일할 수 있었죠. 아픈 기억도 있지만 고마운 마음이 더 큽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기로 했어요. 우리 마을의 소중한 우체국입니다."
오후 5시, 마침 빨간 제비가 그려진 우체국 차량이 마을 어귀를 돌아 나선다. 곧 전국 곳곳으로 전해질, 정이 담긴 택배를 가득 실은 채 말이다.
[관련기사]
농촌 집배원에게는 할일이 하나 더 있다 https://omn.kr/24jye
월간옥이네 통권 72호(2023년 6월호)
글‧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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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안남우체국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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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 년 전부터 먼 곳에서의 소식과 선물을 전해주던 존재이자, 안남면 주민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준 '안남우체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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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해 보이죠? 근데 여기, 보통 우체국이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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