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력을 발휘하여 환자 한 명 한 명의 오더를 보고 고치고 나니 벌써 11시이다. 인계받을 시간이 다가왔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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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환자부터 가슴이 답답하다. 내일 대퇴부골절 수술하는데 식사가 아침, 점심, 저녁까지 들어가 있다. 두 번째 환자는 혈당 조절이 잘 안되는 환자인데 혈당 오더가 없다. 세 번째 환자는 오늘 피검사 한 수치에서 신장 수치가 낮아졌으니 항생제 용량과 횟수를 감량하라고 했다는데, 내일 동일 용량의 항생제가 처방되어 있다. 그 다음 환자, 내일 오전 퇴원이라는데 서류가 하나도 작성이 안 된 채로 넘어왔다. 아침밥만 먹고 정규 퇴원인데 저녁밥까지 다 들어가 있고 퇴원 오더 없이 설명만 퇴원이라고 적혀있다. 어떻게 일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집중력을 발휘하여 환자 한 명 한 명의 오더를 보고 고치고 나니 벌써 11시이다. 인계받을 시간이 다가왔다.
"선생님, 일단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시작할게요. 오늘 엉망이었어요. hand part(하드 파트, 손-손목 전문 진료 부서) 1년 차 선생님 코로나 걸려서 지금 다른 부서 주치의가 커버하고 있는데, 전화도 안 되고 문자를 아무리 보내도 아무것도 처방 안 내줘서 제가 다 처방 내서 했어요."
당장 눈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을 다 소화하려면 그때그때 처방을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로스(loss)가 되거나 일이 해결되지 않아 다음 근무자, 그 다음 근무자에게 넘어간다. 마치 자신이 잘못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나의 후배는 나에게 죄송하다고 말한다. 근무 시간 8시간 내내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한 나의 후배는, 인계를 주고 퇴근하는 그 순간까지 해결되지 않은 일들을 선배에게 넘겨서 찝찝하고 죄송스러운 후배로 퇴근한다. 나 또한 인계받으며, 나의 일도 아닌 영역 때문에 내가 밤새 할 일들이 늘어났고 또 '바쁘고 힘든 나이트를 보내겠구나'하는 짜증스럽고 못난 마음을 통제하지 못해 저녁 내내 고생한 후배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 라운딩 도중 환자 이상징후를 발견하고 바로 당직 의사에게 전화했다. 두 번을 전화해도 받지 않아서 같이 일하는 동료 간호사가 환자를 모니터링하고 산소를 주입하면서 활력징후를 측정하고 동시에 전화로 응급상황을 알려야 했다.
"선생님, 환자 Mental(멘탈) 떨어져요.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요. 혈압은 괜찮은데 산소포화도가 80%밖에 안 돼요"라고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환자 상황을 알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10초 넘게 아무 대답이 없다.
"여보세요? 선생님! 안 들리세요?"라고 말하자 탄성과 한숨 섞인 목소리로 "하… 그래서 원하는 게 뭐에요? 이 시간에 어쩌라고. 그럼?" '그래, 하루 종일 수술실 보고 남아서 당직하려면 힘들겠지'라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애써 이해하려 노력해본다.
"아, 오셔서 봐주셔야 할 것 같은데, ABGA(동맥혈가스분석검사) 검사도 나가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아 XX! ABGA나 빨리 나가던지!"
"선생님, 오더 내주세요. 내주실 거죠?" 이미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얘기한다. 1분, 2분을 기다렸나, 우선 인턴 선생님께 응급콜부터 하고 ABGA 오더를 기다리지만 감감무소식이다. 20분이 지나고, 인턴 선생님이 이미 피검사를 했는데도 오더가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컴퓨터 앞에 앉아 당직의 아이디로 접속해서 ABGA검사를 처방한다.
이내 수화기가 울린다. "ABGA결과 왜 안 나와! 안 좋다며! 왜 아직도 안됐어!" 당직실에서 나와 환자 상태는 확인도 하지 않으면서 소리는 어찌나 크게 지르는지 수화기 바깥까지 주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선생님 처방 기다렸는데… 없어서 이제야 했어요. 곧 결과 나올 거예요."
"지금 처방이 문제야? 급하면 급한 대로 빨리해야지! 무슨 처방 타령이야! 환자 안 좋아서 나보고 보라며!"
몸이 하나인 나는, 환자 상태 확인하고 당직 의사에게 노티(의사에게 환자 상태를 보고하고 상의하는 것)하고 인턴 선생님에게 요청하고 오더 내고 다시 환자 지켜보며 1분 1초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땀범벅이 되도록 뛰어다녔는데 그 결과 돌아온 건 주치의의 날 선 목소리다. 만약 여기서 내가 실수하면 늘 그래 왔듯이 나의 탓으로 돌아온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물을 꾹 참는다. 너무 화가 났지만, 화를 낼 틈도 없이 급박한 상황에서 서로 잘잘못을 따지다가 환자를 놓칠까 봐 오늘도 참는다.
나의 환자는, 나에게 온전한 간호를 받지도 못하고 그렇게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당직의는 환자가 중환자실로 내려갈 때가 돼서야 당직실에서 나와 환자를 따라간다. 분노할 시간도 없이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2시가 훌쩍 넘었고, 밀린 나이트 업무를 마치고 나니 데이 근무 간호사에게 인계를 줄 시간이다. 내 얼굴은 어느새 어제 이브닝 내내 고생한 후배의 얼굴로 바뀌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땀은 범벅이 된 모습으로 데이 근무 간호사에게 인계를 해준다.
집에 돌아와서도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중환자실로 옮긴 환자는 괜찮을까? 내가 빠뜨리고 안 한 일은 없나? 데이 선생님에게 인계 못 한 일이 있나?' 퇴근 후에도 밤새 내가 한 일을 복기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헝클어진 머리... 눈물샘 터진 신규 간호사
하루 쉬고 또다시 이브닝으로 출근했다. 인계받으려고 앉자마자, 독립한 지 2달 된 신규 선생님이 어제 아침 퇴근 때 나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인계 준비를 하고 있다. 분명히 밥도 못 먹었을 것이다.
"왜 그래, 쌤 무슨 일 있어? 아직 인계 시작도 안 했는데 왜 울려고 해?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이 말에,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샘이 터졌나 보다.
"선생님, 저는 이 길이 아닌가 봐요... 못 하겠어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선 커다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계속 흘린다.
"알아, 쌤 그 감정 나도 어제 하루 종일 일하면서 느꼈어. 10년 차인 나도 이런데 이제 두 달 된 선생님은 얼마나 힘들겠니… 미안하다… 간호사가 간호사 일만 할 수 있어도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을 텐데…"
위로를 건네지만, 위로될 수 없음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hip part(힙 파트, 엉덩이 넓적다리관절 전문 진료 부서) 1년 차 전공의가 휴가를 갔고 파트너인 4년 차 선생님은 수술중이라 환자를 볼 수 없으니 수술하는 동안 hand part(하드 파트) 1년 차 선생님에게 노티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신규 선생님이 담당하는 환자 vital(바이탈)이 흔들리고, 혈압이 70까지 떨어지면서 산소포화도도 떨어지고 환자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변량도 현저하게 줄고 혈액검사 결과 신장 수치도 급격히 안 좋아져서 오후 항생제를 그대로 달면 안 될 것 같아 상황을 hand part(하드 파트) 1년 차 주치의에게 알렸으나 매우 곤혹스러워하며(주치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본인 파트도 잘 모를 때였다) 본인이 결정하기에 무리가 있어서 수술이 끝나면 담당인 4년 차 선생님과 상의하라고 했다고 한다. 일단 환자 상태를 지켜보면서 응급상황이 생기면 다시 연락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환자는 나에게 넘어왔고, 인계받자마자 환자 혈압을 쟀는데 여전히 70~80대였고, 의식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허공에 손짓·발짓을 하고 있었다. 수술한 지 하루밖에 안 되어서 절대 안정해야 하는데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내려오면서 몸에 있는 수액 줄을 다 잡아빼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환자를 진정시키고 4년 차 주치의에게 전화했지만, 수술이 안 끝났는지 받지 않았다. 1년 차 주치의에게 전화하면 어차피 같은 답변이 돌아올 것 같아, 환자 상태와 다음날 오더 항생제 용량 관련해서 문자를 보냈다.
나는 왜 간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