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
송경동
정작 재원이라곤 단 한 푼도 없었습니다. 초기엔 고문을 맡고 계신 화가 신학철 선생님과 윤성현·이정우 원장 등이 주춧돌 기금을 내주시고 가능한 많은 분들이 십시일반의 마음을 모아 줘서 가능했습니다. 고 백기완 선생님, 문정현 신부님, 과거 남민전 전사이셨던 이남곡 선생님 등이 고문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현재 민변 회장이신 조영선 변호사님, 희망버스 운동의 주축이었던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동지들 등 참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간 운영위원 등으로 수고해 주셨습니다. 1인 1실의 무료 연대쉼터로 쓸 공간들도 모두 우리 손으로 직접 건축을 마쳤습니다.
긴 투쟁 과정에서 이런 공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기륭,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콜트·콜텍 등의 해고노동자들이 함께 지었습니다. 사회연대쉼터를 함께 짓던 그 벗들이 다시 서울 영등포에 비정규노동자쉼터 '꿀잠'을 만드는데 또 나서기도 했습니다.
전미영, 이윤엽, 나규환, 노순택, 전진경 등 파견 미술팀들이 와서 예쁘게 공간을 꾸며주기도 했습니다. 그간 활동비 한 푼 없이 쉼터지기로 수고해 주신 김진, 장병관, 전한열 등 여러 일꾼들의 마음과 실천엔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귀정사의 부처님은 어쩌면 이들이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중묵 처사님과 함께 쉼터 공동대표로 일해 주었던 순천의 윤성현 들풀한의원 원장, 초대 쉼터지기를 자임해 4년여 일하다 독일로 돌아가 운명하신 고 최정규 선배님도 잊을 수 없는 분입니다.
최 선배님은 1970년대 초등학교를 갓 나와 독일에 탄광 노동자로 갔다가 이후 자동차 공장 등에서 선진 노동 운동을 접하고는 중간 중간 한국으로 돌아와 전노협 건설과 이주노동자 초기 인권운동을 함께하고 민주노동당 창립 당시 남원 연수원 지기 등으로 수고해 주셨던 참 남다른 선배셨습니다. 쉼터를 만들겠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라며 몇 년을 쉼터지기로 일해 주시며 아프고 힘든 이들의 벗이 되어주셨던 참 고귀한 선배셨습니다. 그 마음 기려 쉼터 입구에 '정규목'을 심어 추모하고 있습니다.
나도 쉴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현재 열 칸여의 1인 1실 쉼터를 연중 개방하고 있습니다. 그간 1년에 평균 100여 분의 소중한 이들이 장·단기로 쉼터를 이용해 왔습니다. 몇 달을 쉬는 데 정말 무료냐고 물어 오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학생운동을 거쳐 구로공단과 성남 지역 등에서 일하다 안면괴사증이라는 말 못할 병환을 얻게 된 한 여성 동지는 근 8년여를 쉬어야 했지만 어떤 이용료나 대가도 없었습니다.
뇌졸중으로 반신이 굳어 왔던 부산의 한 동지는 1년 반을 쉼터에서 생활하며 재활을 통해 기적처럼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활동에 복귀해 열심히 일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택시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단식농성 후 쉼터에서 쉬고 갔지만 지병 등으로 운명하시고만 윤종광님도 참 각별합니다. 긴 사회운동 시절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사회연대쉼터에서 잠깐 쉬던 때였다고 했습니다. 윤종광님도 수목장으로 쉼터에 모셨습니다.
채현국 선생님 따라 개운중학교 교장으로 일하다 간경화로 쉼터에서 쉬고 가셨지만 끝내 운명하고 말았던 박종현 선생님 등도 잊을 수 없는 분들입니다.
그간 운영은 말없이 10년을 함께해 주신 100여 분의 CMS 후원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지금도 상근하는 장병관 집행위원장에게 쉼터 운영용 1톤 트럭 기름값 30만 원 드리는 게 다인 가난한 살림이지만 한 번도 구차해지거나 위축되거나 주눅들지 않고 당당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참된 민주주의와 인권 등을 위해 어디선가 힘써 일해 왔을 이들에게 어떤 마음의 부담도 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싸움의 현장을 함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갈등과 분쟁의 현장, 각박한 일의 자리에서 지치거나 상처받아 이젠 쉼이 필요한 동지들을 보이지 않게 지키는 것도 참 소중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