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친일 의존적인 급진적 개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이동인의 사상적 제자였다.
이병길
김옥균은 1885년 겨울에 <갑신일록(甲申日錄)>을 저술했다. 지극히 어려운 시기에 갑신정변(갑신혁명 또는 갑신쿠데타)의 내용을 스스로 기록한 데서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연구자의 분석이다.
그러면 김옥균은 어떠한 동기와 목적에서 <갑신일록>을 썼는가? 전술한 바와 같이 필자 자신이 이에 대하여 밝혀 적은 것은 없으나 <갑신일록>의 글발의 전내용을 통하여 이를 고찰하여 보건대 김옥균은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 이 글을 엮었을 것으로 추단된다.
첫째로 반대파인 수구파의 매국적이며 반동적인 행위를 규탄함과 아울러 개화파 자신들의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정당한 활동을 천명하려고 한 것.
둘째로 갑신정변 수행과 관련하여 발로된 일본 정부의 배신적이며 교활한 행위를 폭로하고자 한 것.
셋째로는 비록 '3일 천하'로 끝난 실패한 개혁이긴 하였으나 다대한 희생을 강요당한 귀중한 그들의 행동과 업적을 영원히 사실대로 전하고자 하였던 것이며 특히 후일의 재기를 위하여 이에서 경험과 교훈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주석 13)
김옥균은 <갑신일록>의 서론 부분에서 수구파인 민씨척족이 이기적 계략에서 국왕을 기만하고, 악질 화폐인 당오전·당십전·당백전을 주조하여 백성들에게 큰 폐해를 주었다고 논박하면서 그 폐해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또한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여 수구파의 반동성을 지적하고, 자신들이 거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어 그 정당성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이유는 김옥균이 자신은 물론 동지들이 거사의 목표를 결코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지시키고자 함이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요인들은 국정개혁을 위한 원대한 계획이 일단 실패로 돌아가자 타국에로의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자기들의 거사가 나라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굳게 믿었다. 까닭에 그들은 비록 일단 실패로 돌아간 정변이기는 하였으나 개화파들이 입은 고귀한 희생과 그 목적과 행동은 귀중한 것으로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석 14)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정부는 물론 후쿠자와나 이노우에가 자신들은 갑신정변에 무관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와 관련 김옥균은 이들의 처사에 배신감을 드러내고, <갑신일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1월 21일…어두워질 무렵에 이노우에가 내방하여 말하기를 근일 공사관의 동정이 대단히 전일과 다른 듯한데 공(公) 등의 관계는 과연 어떠하냐 하고 물었다. 나는 그리 깊은 관계는 없다고 대답했다. 이노우에가 나에게 권하되 이런 좋은 기회를 타서 모사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했다.
나는 대답하기를 나 역시 그러한 의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아직 귀국 정부의 의향을 알 수 없으므로 오직 다께조에의 거동만 살피고 있는 터이니 경동은 할 수 없다. 군이 나를 위하여 후쿠자와 선생을 통해서 근일의 귀 정부의 동향을 좀 자세히 탐지해 가지고 알려주기 바란다.
이노우에가 말하되 나는 이미 3회의 편지를 하였으니 다음 선편쯤이면 무슨 기별이 있을 듯하다. 공(公) 등의 하는 일을 나도 이미 찰지(察知)하고 있는데 공 등은 나에게 숨기고 있으니 한탄할 일이다. 민영익·김윤식 등과 필담한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다. (주석 15)
사학계 일각에서는 갑신정변과 관련 지나치게 일본에 의지한 비주체성을 비판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런 측면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갑신일록>의 다음 내용을 보면 김옥균은 일본측 태도가 못미더워 거사 당일 그 순간까지도 그들의 태도에 의구심을 갖고 다께조에의 동향을 주시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12월 1일…(사마무라가) 일한(日限, 정변을 일으키는 날)은 언제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되 대개 금 20일(음력으로 10월 20일이요 양력으로는 12월 7일이다)로 작정했다(우리들이 결정한 날은 이 날이 아니었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먼저 소정일을 누설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임기응대한 것이다). 시마무라가 가로되 어찌 그리 늦으냐고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되 20일 이전엔 명월이 결점이다. 팔인(八人, 이는 불화 자(火)를 의미한 글이다) 2자는 혹야이라야 그 광채를 발휘하는 것이다.…나는 또 말하기를 일한 (기일)은 귀국의 우선(郵船) 천세환(千歲丸)이 인천항에 들어오기 전에 거사될 작정이다. 시마무라가 말하기를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라고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귀국 정부의 묘의(廟議, 정부 회의)가 또 어떻게 변화될지 알 수 없고 거기에 따라서 다께조에 공사의 금일의 결심이 또 변동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그러므로 나는 천세환(천세환은 매월 20일에 인천에 도착된다)이 도착되기 전에 착수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주석 16)
주석
13> 김사억, <'갑신일록'에 대하여>, 앞의 책, <김옥균>, 300~301쪽.
14> 앞의 책, 304쪽.
15> 앞과 같음.
16> <갑신일록>. 12월 1일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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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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