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의 모습1851년생인 김옥균은 21살 때인 1872년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인간 관계가 폭 넓었고 다재다능했다. 뛰어난 재능과 함께 인간적인 약점도 많았던 그는, 신복룡 교수의 평가처럼 재승박덕(才勝薄德)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위키백과
김옥균의 혁명가적 기질은 아무리 험난한 고초와 시련에도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외딴 섬에 갇혀서도 계속하여 일본 정부에 그 부당성을 항의하고 언론에 폭로하였다.
구미자본주의 열강과의 '조약개정' 문제와 관련하여 맹렬한 공격을 받고 이노우에가 외무상의 자리를 내놓게 되고 그 대신 오쿠마가 외무상으로 된 뒤에 다시 김옥균의 억류문제가 제기되어 1888년 5월에 가서 김옥균을 홋카이도로 천거시키기로 결정되었다.
이때에 일본 정부 내에서 중요하게 문제로 된 것은 김옥균의 정치적 활동이 국내의 반정부세력과 결부되어 문제가 발생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또다시 자객들에 의한 암살사건이 일어나 외국과의 '조약개정' 교섭을 추진시키는 데 악영향을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처럼 진퇴양난에 빠진 오쿠마는 김옥균을 도시 가까이에 두고 감시하는 편이 오히려 유리하다는 것으로 김옥균을 홋카이도의 도청소재지인 삿포로 근처에 보내기로 하였던 것이다. (주석 23)
그동안 체력이 많이 쇄약해졌다. 기후와 음식이 맞지 않아서였다. 그럴 즈음 홋카이도로 이전이 결정되고 한 달 가량 도쿄에 머물다 삿포로에 도착하였다. 1888년 6월이다. 그러나 홋카이도에 머문 기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추진하면서 김옥균을 이용하려는 책략을 꾸몄기 때문이다. 그리고 1890년 10월 그의 홋카이도 억류를 해제, 일본 내지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는 이 해 11월 도쿄로 돌아왔다.
이 시기 국내외의 주요 정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