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 S초등학교 교사가 교내에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진 뒤인 20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 각 교원단체에서 보낸 추모 화환들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학부모들의 솟구치는 민원, 아동학대라는 족쇄에 묶여 맘 편히 지도할 수 없는 교실 안, 수업 이외의 밀려드는 크고 작은 업무들. 해가 다르게 힘들어지는 교육현장에서 손발이 묶인 우리는 한자리에 모여서 "누구 하나 죽어야 이런 상황을 알아주려나"라는 말들을 탄식하듯 내뱉곤 했었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결국 벌어지고야 말았다.
올해로 11년차, 해가 다르게 교육현장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감을 피부로 체감한다. 이번 사건을 접하고 3년 전 그 일이 자동 반사적으로 떠올라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대고 식은땀이 난다.
첫 아이 육아 후 2년 만에 첫 복직. 그 해는 내게 가장 아픈 기억으로 점철된 순간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정신과병원의 문을 두드렸고, 교권보호위원회를 처음 열어봤고, 학교 교실에 비상벨이라는 것을 설치했다.
비속어들을 몸에 감고 살았던 그때
그 당시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비속어들을 몸에 감고 살았다. 휴일이고 평일이고 가리지 않고 오는 전화와 문자에 내 하루는 그 학부모로 인해 좌지우지 되었다.
그 아이를 보면 꼭 그 학부모가 앉아있는 것 같아 수업을 하면서도 늘 위축되었고, 어쩌다 교실에서 놀이를 하다가 그 아이가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집에 가서 어떤 말을 할까 조마조마하며 하루를 보낸 적도 있었다. 그 문제의 그 학부모는 불쑥 학교를 찾아와 문을 잠그고 상담을 요청하며 욕을 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 전에도 학교생활을 하며 많은 어려운 학부모들을 매해 겪어왔었다. '딱 일 년만 참자'라는 마음으로 삼키고 살아왔지만 당시만큼은 한 순간도 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밤에 자면서도 그 학부모 생각에 가위눌림도 여러 차례 경험했으니까.
당시의 내 삶은 모두 그 학부모에게 반납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이겨내야만 했다. '엄마 사랑해요'라고 쓴 아들의 스케치북 그림을 내 휴대폰 배경화면에 넣어두고 들여다보며 말이다.
당시 나는 학부모의 연락이 있을 때마다 교감선생님께 알렸고, 학교 측에 '교권보호위원회'를 열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고, 교육청 신문고에도 내 사정을 알렸다. 학부모에 대한 처벌이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아 사실상 교권보호위원회 처벌은 서면사과 정도가 다였겠지만, 그래도 교사가 겪는 어려움을 확실히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이전엔 그냥 꾹꾹 눌러 참아온 것들을 하나씩 드러내니 숨구멍도 조금씩 트여오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조치 끝에 나는 다른 학교로 옮겨갔고, 교육청 연계 상담을 받으며 상처 났던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어갔다. 하지만 이후 나를 대신해 담임으로 들어왔을 다른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 한구석에는 늘 무거운 돌덩이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해당 학부모가 이전에 했던 일들로 인해 학교 측과 걸려 있던 소송에서 지면서 처벌이 내려졌고, 그들은 내게 미안하다는 편지를 전해왔다. 또 그 이후로는 학교의 담임 교사에게는 전혀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내 가슴 속 돌덩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저만 좋은 학부모 만난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