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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와 관련 있는 이곳의 현대사

[탄자니아] 대륙과는 다른 섬, 잔지바르

등록 2023.07.31 09:08수정 2023.07.3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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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를 떠나는 새벽,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아디스아바바를 경유한 비행기는 더 남쪽으로 내러갑니다. 적도를 지나 드디어 남반구에 접어들었습니다. 인도네시아를 여행했을 때 한 번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남반구 방문입니다.

도착한 곳은 잔지바르입니다. 잔지바르는 탄자니아에 속한 작은 섬이죠. 잔지바르 섬의 면적은 1,666㎢입니다. 부속 도서를 다 합해도 2,462㎢에 불과합니다. 인구도 200만이 되지 않습니다. 아주 큰 섬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죠.


특히 탄자니아 본토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탄자니아 전체의 인구는 6천만 명을 넘으니까요. 면적도 95만㎢ 가까이 됩니다. 남한의 9배를 넘는 면적입니다. 그러니 탄자니아에게 잔지바르는 더욱 작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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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스톤타운 ⓒ Widerstand


하지만 잔지바르가 탄자니아에서 갖는 의미는 상당히 큽니다. 잔지바르는 탄자니아 앞에 위치한 섬이었던 만큼, 해양 무역 세력의 주된 교통로로 활용되었습니다. 인도나 페르시아, 아랍과 포르투갈의 상인들이 동부 아프리카와 교류하는 무역 기지였죠.

1698년, 잔지바르는 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오만이 아라비아 반도 끝에 위치해 있죠. 하지만 당시 오만 제국은 이 땅을 포함해, 아라비아 해의 해안 지방을 광범위하게 지배하던 해양 식민제국이었습니다.

잔지바르는 오만 제국의 동아프리카 무역 최전선에 위치한 땅이었습니다. 동아프리카 무역이 번성하면서, 1840년에는 잔지바르가 오만 제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죠.

이후 1856년, 오만 제국은 분열합니다. 잔지바르에는 오만 제국을 이은 잔지바르 술탄국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곧 영국이 동아프리카에 진출하기 시작했죠.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며 동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잔지바르 역시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합니다.

잔지바르는 동아프리카의 작은 섬이었지만, 최전선의 무역 기지로서 활약했습니다. 그것은 인도나 페르시아, 아랍 상인에게도, 오만 제국에게도, 영국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덕분에 긴 식민의 역사가 이어졌지만, 한편으로 무역은 잔지바르에 큰 부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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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의 아랍 성채 ⓒ Widerstand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잔지바르는 탄자니아 본토와는 달랐습니다. 잔지바르 지역을 제외한 탄자니아 본토는 '탕가니카'라고 합니다. 사실 원래 탕가니카는 독일의 식민지배를 받던 땅이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 독일이 패전국이 되면서 영국에게 넘겨준 땅이었죠.


그러니 역사적인 경험도 많이 달랐습니다. 식민지 이전에도 두 지역은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었죠. 탕가니카 지역은 반투계 민족이 활동하며 스와힐리어의 영향이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반면 잔지바르에는 아랍이나 페르시아계 상인들이 많이 오갔고, 덕분에 아랍어의 영향력도 강했죠. 특히 잔지바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펨바 섬의 주민들은 스스로가 페르시아의 후손이라는 의식이 강하다고 합니다.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에도 탕가니카와 잔지바르는 별개의 영토였습니다. 탕가니카는 1961년 독립했죠. 잔지바르는 1963년 잔지바르 술탄국으로 독립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잔지바르에서는 쿠데타가 벌어졌죠. 술탄정은 폐지되었고 아베이드 카루메 대통령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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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의 해변에서 축구를 하던 아이들 ⓒ Widerstand


탕가니카와 잔지바르가 통합된 것은 쿠데타가 일어난 같은 해, 1964년 7월의 일이었습니다. 잔지바르의 카루메 대통령과, 탕가니카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 사이 합의의 결과물이었죠. 탄자니아라는 국호 자체가 '탕가니카'와 '잔지바르'를 합쳐 만든 것입니다.

영토나 인구는 탕가니카 쪽이 물론 많았지만, 잔지바르에도 많은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잔지바르에는 광범위한 자치권이 주어졌죠. 탄자니아의 공식 국호는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United Republic of Tanzania)'입니다. 탕가니카와 잔지바르의 연합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죠. 1995년까지는 잔지바르의 대통령이 탄자니아의 제2부통령직을 겸직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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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박물관 ⓒ Widerstand


이렇듯 이질적인 역사와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탄자니아와 잔지바르의 이미지는 많이 다르기도 하죠. 잔지바르는 휴양지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으니까요. 잔지바르에서 제가 만난 현지인 역시, 이곳은 다르에스살람과는 다르다며 한참이나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잔지바르는 밴드 퀸(Queen)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연히도 제가 묵은 숙소 바로 앞이 프레디 머큐리가 살았던 집이라고 하더군요. 작은 박물관이 되어 있는 그 집을 저도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계 파르시 출신입니다. 그러니 오래 전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넘어온 조로아스터교 신자의 후손이죠. 그 후손이 같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잔지바르로 넘어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영국으로 건너가 밴드를 만들고, 세계적인 스타가 된 것이죠.

현재 잔지바르에는 인도계 파르시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잔지바르 술탄국이 무너지던 당시 인도계와 아랍계 인구 대부분이 추방당했기 때문입니다. 프레디 머큐리의 집안 역시 당시에 영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어쩌면 프레디 머큐리의 일생 자체가 잔지바르라는 섬의 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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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의 항구 ⓒ Widerstand


잔지바르에는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성수기가 시작되어서인지, 다른 곳에서 잘 보지 못했던 한국인 여행자들도 가끔 눈에 띄었습니다. 잔지바르의 구시가인 스톤타운 골목에는 현지인만큼이나 관광객의 수가 많아 보였습니다.

잔지바르는 휴양지입니다. 저도 잔지바르에서는 별다른 일정 없이 골목을 산책하거나, 해변을 바라보며 며칠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스톤타운의 골목은 평화로웠습니다. 동아프리카에서 떨어진 이 섬은, 마치 동아프리카의 모든 문제에서도 동떨어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리 없겠죠. 이 휴양지에도 역사와 정치의 그림자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완전한 이방인 같았던 프레디 머큐리의 삶에서도 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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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의 해질녘 ⓒ Widerstand


지바르를 떠나기 전날, 오후부터 이어진 정전은 저녁 무렵까지 이어졌습니다. 골목을 걸으며 제가 만끽한 평화조차, 성수기에 바다를 찾아 온 관광객의 것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전도, 정치도, 역사도, 모두 내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관광객이니까요.

전기가 끊어진 숙소에서 나와, 역시 불이 꺼진 가게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잠시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습니다. 대륙과는 떨어진 이 섬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했습니다. 멀지만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사람들의 역사는 이 휴양지에서도 여전히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세계일주 #세계여행 #탄자니아 #잔지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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