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봉인 줄 알았는데 딱봉.
최은경
그렇게 일곱 번의 여름을 무사히 지나며 어느새 복숭아는 부적 같은 과일이 되었다. 작고 고운 복숭아 한 알에 위로받는 저녁이 쌓였다. 세 식구 모여 복숭아를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다 괜찮을 것 같다고. 한 해 잘 살아 여기 왔구나, 아이는 무탈하게 잘 자라 다시 복숭아를 먹는구나. 계절이 돌고 돌아 우리 앞에 복숭아를 놓아주는 게, 부적이고 작은 기적이다.
"그때, 서윤이 임신하던 해에, 그땐 어떻게 그렇게 복숭아가 달고 맛있었을까." 하는 내 말에 남편은 묻지도 않고 "응, 그랬지." 답한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남편은 단 번에 그 시절의 일과 마음을 기억해 내 공감했다. 냉장고에 떨어지지 않게 복숭아를 사다 나른 장본인이고, 내가 기억하는 인생 최고의 복숭아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같이 먹은 사람이니까.
우리는 많은 시간 별처럼 각자의 궤도를 돌지만, 서로를 비춰 주기도 한다. 함께 보낸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의 과거를 기억해 주며 깜빡, 신호를 보낸다. "응" 하는 짧은 말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로, 어떤 눈빛과 표정으로.
삶이라는 거대한 우주에서 누구와도 동일한 궤도로 돌 수 없고 완벽히 만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삶 곁에서 같은 방향으로 돌고 있는 누군가가 있어 찰나의 순간 서로를 알아채고 사라진 기억에 빛이 비춰진다. 함께라는 게 고맙고 소중하다.
복숭아가 복숭아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복숭아를 키우느라 몇 년은 나와 남편, 둘 다 버티는 마음으로 살기도 했는데. 앞으로도 언제든 그런 시간이 찾아올 테지만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해가 거듭될수록 아이 키우기는 혼자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더 크게 실감하게 되니까.
신비복숭아가 끝나자마자 나는 완전히 여물지 않은 딱딱이 복숭아를 사 와 가족들의 불만을 샀다. "무를 먹는 것 같다"며 다들 질색했지만 "아직 맛이 덜 들었네... 그래도 은은한 향이 있지 않아?" 하면서 혼자 꿋꿋하게 먹었다.
연일 폭염이 기승이다. 더위에 곡식이 자라고 과일이 영글어 간다고 마음을 너그럽게 풀어본다. 뜨거운 햇볕 닮은 진한 향과 단맛이 과일 안에 고이고 있다고.
본격 무더위에 지쳐가지만 복숭아 생각을 하면 기운이 난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복숭아, 단물 뚝뚝 흘리며 후르릅 먹을 복숭아를 생각하면 이 더위도 제 역할을 하느라 이토록 요란한가 보다 싶고.
진짜 복숭아의 계절은 이제 시작이다. 당신의 취향이 손에서 팔꿈치까지 단물을 흘리며 먹는 황도일지, 아삭하고 향긋한 딱딱이 백도일지 알 수 없지만, 냉장고에 차게 넣어둔 잘 익은 복숭아를 떠올리며 더위에 지친 마음을 달래면 좋겠다. 각자의 마음속 최애 과일을 알차게 먹으며 늘어지는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북돋길.
다음에는 황도를 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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