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그리며> 책 표지
최인선
마당 있는 집에서 살다
나는 운좋게도 학창 시절 마당 있는 집에서 살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된 뒤에도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오래도록 그 마당을 누렸다. 그러니 마당 있는 집에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나중에 새롭게 이사 간 집은 처음엔 어색했다. 그 서먹함을 밀어내고 천천히 정을 붙일 필요가 있었다. 도시 소음도 낯설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자 자연스럽게 정이 쌓이게 되었고, 내가 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그곳은 점차 나만의 공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낯설었던 공간이 어느새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공간이 되기까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건설업체의 요구로 정든 집을 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파트에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우리 가족은 아파트라는 현대적인 공간에 대한 동경, 겨울에 춥다는 단점 등을 빌미로 아파트로 이사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여기서 오래 살았으니까 밝고 편한 아파트로 가는 것도 괜찮겠군요."(103쪽)라는 <너를 그리며> 한 구절처럼 집을 판 뒤 이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이면에는 정든 곳을 떠나야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20년 동안 살았던 집을 등지고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다. 모서리 모양의 집 형태와 겨울에 몹시 춥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내게는 소중한 공간이었음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하는 전날과 당일 느꼈던 여러 감정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나의 학창 시절 전부를 헐값에 헌납하는 느낌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마냥 좋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신발을 신은 채 방안에 들어와 살림을 나르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어느새 텅 빈 공간에 서 있게 되었을 때, 느꼈던 복잡한 심경은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부모님이 집을 판 후에도 그 집을 잊지 못해 종종 찾아가거나 멀리서 바라보기를 몇 번 한 후에야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그런 행동은 정든 공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도였던 것 같다. 내가 살던 옛집은 이제 존재하지 않지만, 그 공간과의 추억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옛집을 떠날 때 힘들었던 것은 20년 전 이사 오기 전부터 우두커니 마당에 서 있었던 목련 나무 때문이었다. 나무는 내게 계절을 가르쳐 주었고, 밖에서 치이고 돌아온 날에는 위로가 됐다. 봄에는 화려한 꽃으로 봄기운을 느끼게 해주었고 여름에는 넓은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줬다. 가을에는 소리 없이 떨어지는 잎의 낙하로 삶과 죽음을 알려주었고 겨울에는 털로 덮인 목련의 꽃눈 형태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삶의 순환을 알려주었다. 마당에서 성장하는 꽃들과 나무는 오랜 시간 병든 내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었던 셈이다.
그래픽 노블 <너를 그리며> 이야기 속 어린 선우도 창문 너머 보이는 마당 앞 은행나무를 보며 성장한다. 나처럼 <너를 그리며>의 주인공 선우도 은행나무 옆에서 여러 사연을 쏟아냈다. "너무 슬퍼서 계속 읽어줄 수가 없어!! 미안해."(61쪽), "나 오늘 농구선수 봤어. 키 엄청 크고 TV로 보는 것보다 훨씬 잘생겼다고.", "넌 나무라서 좋겠다. 학교 안 가도 되고", "봐!! 눈사람이야. 귀엽지? 얜 이제부터 널 지켜주는 수호신이다!!"라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