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시인이 되고 싶은 말랭이마을 사람들

말랭이동네글방 정규수업 마지막은 장항송림욕장 현장체험

등록 2023.08.29 08:55수정 2023.08.2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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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송림욕장에 피어난 맥문동꽃 꽃길따라 1시간여, 사방사방 맥문동과 소나무길 따라 산책하기 참 좋다 ⓒ 박향숙

 
군산과 장항을 잇는 동백대교를 건너 장항송림욕장에 들어서면 환상의 빛이 맴돈다. 푸르디 푸른 하늘 아래 진회색 바다갯벌들의 넓은 품자락, 바다풍을 걸러주는 검붉은 해송 등치 아래 보랏빛 화살촉들의 무리, 맥문동으로 펼쳐진 이곳은 가히 신비로운 세상이다. 말랭이마을 글방어머님들의 오늘 수업은 맥문동과 송림 길을 걸으면서 늦여름 향기를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촉촉히 비가 와도 걷기 딱 좋네. 꼭 어린 시절 소풍온 것 같고만."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어. 이렇게 작가님들이 수고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글방수업 6개월의 정규과정 마무리를 바깥으로 나가서 당신들께서 배웠던 글자를 시나 짧은 산문으로 써보자는 의견이 있었다. 젊은 시절엔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꽃구경을 못갔고, 나이 들어선 허리 다리 아파서 제 발로 다니기가 힘들어서 못간다고 푸념하셨다. '세상에 꽃 없는 곳이 없고 꽃 없는 때가 없지만 가고 싶을 때마다 자식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더더욱 괴로운 일이지'라고 한 말씀을 기억했다.

글방수업 24주간 동안 '단자음과 단모음' 교재, 총 24단원을 끝내고, 24편의 아름다운 시를 낭독했다. 그림이야기 책 역시 24권을 듣고 읽고, 독후활동을 통해 그림책의 매력을 알았다. 11명의 참여자 중 매주 출석율이 90퍼센트 이상이었고, 언제나 수업 30분 전에 와서 지도선생인 나를 기다리셨다. 가을엔 특별수업으로 이중자음과 이중모음이 들어있는 교과서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슬비 내리는 장항 갯벌 소나무 숲과 맥문동의 조화는 묘한 신비감을 준다. 최근 몇 년 사이 관광객들에게 소문이 나서 평일에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작년에 군산과 가까운 장항과 서전 일대의 관광지를 소개하는 글을 쓰고자 검색하던 중 장항 송림과 맥문동 꽃 축제행사를 알았다.

군산보다 훨씬 작은 지역인데도 같은 서해바다의 초입을 둘러싼 자연경관을 잘 살려 관광지화 하는 행정이 눈에 띈다. 자연생태관, 작은 항구들, 서해갯벌, 소나무군락지, 지역인들 추모관 및 옛 문인들의 고택, 그리고 크고 작은 산림 휴양지 등 한 시간 거리 이내에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볼거리가 상당히 많다.


글방 어머님들께 한 시간여 자유시간을 드렸다. 휴대폰 카메라를 열고 천천히 걸으면서 직접 풍경 사진도 찍고, 벗들도 서로 찍어주라고 했다. 무엇보다 오늘의 수업이 현장체험이니, 꽃 한송이, 소나무 한 가지를 보더라도 자세히 보시며 곰곰이 시상(詩想)을 생각해보시라고 했다.

마치 유치원 어린이이들 소풍 와서 뒤따라다니며 아이들을 케어하듯, 나도 역시 어머님들 뒤태도 찍고, 풍경이 좋은 곳에서 개인 사진도 찍어드리는 보조역할을 했다. 가장 연장자인 방자 어머니(87)의 허리 꼿꼿한 걸음 자태는 과연 말랭이마을의 건강미를 자랑하는 대표미인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동네 한바퀴로 아침을 시작하는 강단과 부지런함, 성실함이 진정 사실이라고 칭찬해드리니 세상에서 가장 큰 웃음으로 화답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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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시인의 <풀꽃>을 낭독하는 정엽어머님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시를 낭독하며 즐기는 어른들 ⓒ 박향숙

 
서천의 대표시인 나태주 선생님의 대표 시 <풀꽃1> <풀꽃2>가 맥문동 꽃길 사이로 서 있었다. 가장 먼저 발견한 정엽 어머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물었다

"이 시 참 좋네. 게다가 짧아서 기억하기도 좋아. 유명한 시인인가 비석도 있고만."
"엄청 유명하시죠. 어머님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신데, 건강하고 올해만 해도 시집이 몇 권이나 나왔어요. 학교 선생님으로 퇴임하시고 지금은 공주 풀꽃문학관에 계세요."
"내가 이 시 한번 읽어볼까? 소리내서 읽고싶네."
"와. 어머님 진짜 짱! 멋있게 읽어보세요. 잘 기억해서 어머님 시 쓰실 때 응용해보세요."


풀꽃1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평소에 부끄럼이 많아 나서지 않던 흥자어머님도 뒤질세라 낭독을 자청, 근엄하게 읽으셨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글방수업 6개월 만에 글자를 알고, 시를 알더니 시인이 되고 싶은 어머님들. 그들의 마음이 이제는 저 서해바다보다도 우렁차고 담대하리라. 저 해질녘 서해노을보다고 붉게 빛나고 황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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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빛 맥문동꽃이 이슬비에 촉촉히 장항 송림욕장에 피어난 신비로운 채색, 여행객,사진사들의 눈을 사로잡다 ⓒ 박향숙

 
어머님들이 한턱 낸 점심을 먹고 센터로 귀향해서 현장체험 후기를 나누었다. 한번 나갔다오면 맘이 들떠서 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그래도 갈 수 있으면 또 가고 싶다고, 우리가 이제 할 일이 얼마나 더 있겄냐고, 정말로 우리마을 작가들에게 고맙기만 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체없이 지도선생으로 숙제를 냈다.

"어머님들.. 오늘의 숙제는 무엇일까요? 다 알고 계시죠? 오늘 다녀온 소감을 그림과 글로 써서 보여주세요."

이제는 어느 누구도 '난 못혀, 너무 어려운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한결같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난 맥문동 꽃 그려야지' '나는 생전 처음 먹어 본 팥빙수를 그려볼껴' '나는 나태주 시인처럼 시를 써야지' '정자에 앉아 바닷가 본 거 그릴까'...

바닷바람 막아주는 소나무, 그 밑둥에서 피어난 맥문동 꽃, 꽃길을 걸으며 잠시라도 세상시름 떨친 어머님들에게서 나올 시와 그림이 기다려진다.
#말랭이마을 #글방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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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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