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임시안치소 모습
김영희
보도연맹원이 가장 많이 학살된 진주, 왜?
진주는 조선 말에 임술농민항쟁(1862년)이 최초로 일어났고,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는 백정 해방운동인 형평운동과 소년운동의 3대 발상지다. 진주사범학교 등 4곳의 중등학교가 있어 교육받은 인력이 많이 배출됐고, 이를 바탕으로 민중운동과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지리적 조건으로는 빨치산의 근거지인 지리산 인근 지역에 위치해 있어 빨치산들로부터 진주형무소 습격을 자주 당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국민보도연맹(아래 국보연)의 좌익활동이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948년 10월19일 여순항쟁 이후, 정부는 좌익인사를 전향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1949년 4월 20일에 국보연을 결성한다. 당시 남로당 등 좌익단체 가입자들은 자수와 동시에 국보연에 가입한다. 경남도연맹에서 발표한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었다.
진주연맹의 결성선포대회는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사상전향자와 자수자 1000여 명과 진주경찰서장(이정용)이 이사장, 진주인민당 위원장(박진환)이 간사장으로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후 보도연맹원증을 발급하고 지서별로 이들을 훈련, 교육 등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특히 쌀, 보리 등 식료품을 준다고 회유해 보도연맹이 어떤 단체인지도 모르던 농민들까지 가입시켰다.
1950년 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 오는 인민군 제6사단과 함양으로 진격하는 인민군 제4사단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한다. 이에 진주는 진주지구 육군특무대(CIC)와 5사단 소속 진주지구 헌병대∙진주경찰에 의해 7월 31일 진주가 함락되기 전인 7월 21일부터 26일까지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자, 보도연맹원 등 집단학살을 단행한다.
송진근(해방일보 특파원) 기자에 따르면 피학살자는 애국자(독립운동가) 약 2000명과 보도연맹원 1500명 등 3500명이다. 진주는 현재 학살지 24개소 중 10차 발굴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운명의 논문 한 권
발굴작업 진행 중 어느 날, 당시 강병현 진주유족회장이 논문 한 권을 필자에게 건넸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읽어 보니 대학교 은사이신 고 이상길 교수의 논문이었다.
이 교수는 생전에 경남지역 학살지마다 시굴과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마산합포구 여양리와 문산 진성고개, 산청 외공리, 경상 코발트 등 유해 발굴에 혼신을 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논문을 통해 이 교수가 생전에 유해발굴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 헌신과 노고를 다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용산고개의 참혹한 학살 현장에서 집단학살범죄(제노사이드)를 은폐한 역사적 사실을 목격한 순간, 필자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만이라도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역사 교사로서 아픈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8종 중 모두 한국전쟁 단원은 있지만 민간인 학살과 보도연맹 관련 내용이 서술된 교과서는 1종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 후 지금까지 20차 전국유해발굴 자원봉사를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