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신언직
문세경
"올해 환갑이 되었지만 저는 현재 직업이 있어요. 특성화고에서 노동인권 강의를 하고 전태일 기념관에서 시민들과 노동조합을 대상으로 노동인권 교육을 하고있어요."
지난 9월 5일, 중구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신언직(60, 전태일재단 노동인권 강사)을 만났다. 신언직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인사한다. 그와 만나기 며칠 전, 그동안의 활동을 요약해서 적어 달라고 했다. 메시지 창에 빽빽히 적힌 활동내용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떤 질문을 해야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설계한 인생 2막은 예상대로 펼쳐지고 있을까, 말 못할 사연을 들추지는 않을까, 하면서 며칠 동안 고민에 빠졌다.
신언직은 내 속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직업을 말하고 말문을 텄다. 질문을 마음껏 해도 될 것 같은 신호로 들렸다. 내가 "사생활 터는 데 전문"이라고 장난스레 말했더니 "얼마든지 털어가라"며 해맑은 얼굴로 답했다.
세 번의 감옥생활, 그를 버티게 한 힘
메시지창에 빽빽하게 적힌 활동에는 '감옥생활'이 무려 세 번이나 쓰여 있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빡세게 살았다는 걸 알고 놀랐다. 그는 세 번의 감옥생활을 어떻게 견뎠을까.
"세 번 모두 독방에 있었어요. 시간이 안 가는 게 제일 힘들었죠. 맨날 수배당하고 도망 다니느라 밥을 잘 못 먹었어요. 그래서인지 감옥에서 먹는 밥은 맛있었어요(웃음). 두 번째 감옥에 갔을 때는 동구사회주의가 무너졌을 때에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감옥생활이 힘든 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활동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못 찾아서였어요. 노동조합 위원장도 아니고, 뛰어난 이론가도 아니고, 의욕만 넘쳤던 활동가여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세 번째 감옥에 간 것은 2000년에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투쟁을 하다가 구속됐어요."
신언직은 세 번의 감옥생활에서만큼 진지하고 치열하게 삶을 고민한 적이 없었다. 고통을 겪은 인간은 단단해진다고 했던가. 몇 개월에 걸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면서 다짐했다.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치열함과 진지함이 있다면 못 할 것이 무엇이냐. 뛰어난 이론가가 아니면 어떻고, 배고픈 노동자가 아니면 어떻고, 유명한 대중 지도자가 아니면 어떤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뚜렷한 소명이 있으면 그 길을 가면 된다'고.
1992년, 두 번째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신언직은 곧바로 제13대 대통령 선거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운동본부에서 활동한다. 2000년, 세 번째로 구속되었을 때는 결혼 후였다. 사회에 발 딛자마자 활동을 시작했고 그 후로도 줄곧 제대로 된 밥벌이를 못 했을텐데 가족의 생계를 어떻게 꾸렸을지 궁금했다.
"처음 사회 활동을 한 곳은 1992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였어요. 그때는 월급이 없었어요. 활동비로 5만 원 받았어요. 1995년에는 민주노총에서 일했는데 월급제를 도입해서 첫 월급으로 75만 원을 받았어요. 그 이후에는 전 민주노동당 의원이었던 단병호 위원장님의 보좌관 활동을 해서 수입이 있었어요. 하지만 당시 노동자의 평균임금인 180만 원만 받고 나머지는 특별당비로 냈어요. 180만 원으로 두 아이와 아내를 책임지기에는 부족했어요. 아내는 전공이 미술이었는데 원하는 그림을 못 그리고 돈을 벌 수밖에 없었어요."
신언직은 자신이 일관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덕분이라고 했다. 1992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두 번째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오면서 결심한다. 앞으로 10년 동안은 노동운동을 하고, 40대에는 진보정당을 만드는 일을 해 보겠다고. 그가 결심한대로 40대 초반까지는 전노협과 민주노총에서 활동했고, 40대에는 민주노동당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50대에는 생각지도 않게 심상정 의원 보좌관을 두 번(8년)이나 했다. 신언직은 두 번의 보좌관 생활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 플랜에 없던 보좌관 생활을 하면서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기회를 얻었어요. 밤, 낮이 따로 없는 바쁜 생활이었지만 무척 보람있는 일이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삼성 무노조전략문건을 입수해서 공개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