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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산 금성 오븐복합레인지, 아직 잘 씁니다

딱히 바꿀 필요가 없어서... 아낀다고 부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아낍니다

등록 2023.09.24 11:47수정 2023.09.2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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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이잉."


전자레인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잠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또다시 요란해진다. 고개를 반쯤 기울이고 힘겨워하는 전자레인지를 보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우리는 이렇게 아끼고 사는데 왜 부자가 못 되는 걸까?"

식탁에 앉아 반찬을 깨작거리던 남편이 내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뭘 아꼈는데?"
"아, 이거. 이 전자레인지. 이건 대체 몇 년이나 됐을까? 30년 아니 40년은 됐으려나?"

"에이, 40년은 무슨 40년. 30년이면 또 몰라도. 그리고 그거 하나 아낀다고 부자가 되겠어?"
"아니지, 오래된 것이 이거 하나면 말을 않지. 우리 부엌을 한 번 봐 봐. 거의 다 오래된 거지. 저기 있는 저 식기 건조기. 쟤도 아마 30년은 넘었을 걸. 거기다 산 지 얼마 안 된 냉장고와 김치냉장고는 또 어떻고. 모르긴 해도 10년은 됐을 텐데."


"글쎄, 다들 그 정도는 쓰고 살지 않을까? 그 정도 아낀다고 부자가 됐다면 우리나라 사람들 다 부자가 됐을 거야. 그게 아닌 걸 보면 그 정도 아껴서는 부자가 되지 않는다는 거지."
"하긴. 그렇지만 우리처럼 물건들을 대물림해서 사용하는 집은 흔치 않을 걸."


대를 물려 쓴 전자레인지와 바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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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전자레인지 시어머니께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는 전자레인지이다. ⓒ 노은주

 
남편과 내가 수명을 따져가며 이야기하는 전자레인지와 식기건조기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 때부터 지금까지 쓰고 있는 물건이라는 게 맞다.

남편과 나는 시댁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때의 시댁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되었고, 어머니께서 쓰신 물건은 우리가 쓰는 물건이 되었다. 결혼할 당시 부엌을 따로 쓰지 않았기에 특별히 부엌살림을 구입하지 않았더랬다.

그런 까닭에 지금의 부엌에는 내가 구입한 물건보다 어머니께서 쓰셨던 물건들이 더 많다. 쓰던 물건을 께름칙하게 여겼다거나, 물건 사는 걸 좋아했다면 부엌은 확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런 것엔 무딘 사람이었다. 깨끗한 물건인데도 어머니께서 쓰신 물건이라는 이유로 바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용한 물건들이 지금까지 남아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며 덜컹거리는 몸으로 나를 돕고 있다. 

게다가 그런 물건 중에는 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물건도 있다. 이것 역시 3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부엌에서 나의 살림을 돕고 있다. 늘 함께 하기에 잠시라도 사라지면 부재가 바로 드러나고, 하루라도 쓰이지 않는 날이 없는 물건이다.

너무 저렴해서 물려받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낯간지럽지만, 어머니의 손을 거쳐 나에게 전해졌기에 부득이 물려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초라하지만 쓰임에서는 최고의 유용성을 자랑하는 물건, 넘사벽의 가성비를 가지고 있는 물건.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어머니의 플라스틱 바가지. 쌀 씻는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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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쌀 씻는 바가지 플라스틱바가지가 얼마나 튼튼한지 3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다. ⓒ 노은주

 
어머니의 바가지는 박완서의 '해산바가지' 속 바가지처럼 신성한 의미를 가진 것도, 정갈하고 단정한 외모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벼운 몸무게에, 약간의 유연함을 지닌 채, 촌스럽도록 화려한 주황색을 지녔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 바가지로 쌀을 씻을 때는 밥을 짓는 일은 몸과 마음을 챙기는 성스러운 일이다란 생각은 잊고 쌀을 박박 문지르게 된다. 허물없이 사용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쌀 씻는 일만은 너에게 맡긴다란 막중한 임무는 주고 있다.

하여 이미 땅 속에서 천덕꾸러기로 남았을 플라스틱이 수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룩하고 있다. 30년 가까이 살아내면서 말이다. 쓰임이 있으면 버텨내는 힘이 강해진다는 건 맞는 말이다.

물건에 애정을 담는다면

이처럼 오래된 물건 몇 개를 아꼈다 하여 부자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중얼거려 본 것은 오랜 시간 내 곁에 머물러 준 물건에 대한 고마움과 대견함 때문이었다.

내가 물건을 산 후 10년이고 20년이고 쓰려 노력한 것은 부자를 꿈꿔서도 아니었고, 물건을 사지 못할 만큼 가난해서도 아니었다. 그건 단지 물건들이 자신의 쓰임을 조금 더 오래 유지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사용 가능한 물건이라도 버려지면 가는 곳은 결국 쓰레기처리장일 테니.

지금의 우리는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살고 있다. 절약만 하고 소비를 하지 않으면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 사회에 사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너무 새로운 것에만 열광하지 말고,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물건에 애정을 품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한다.

조금 더 아끼는 마음으로. 그러다 보면 물건들이 자신의 쓰임을 알고 더 오래 버텨내지 않을까? 물건이지만 주인의 마음을 알아채지 않을까? 늘 곁에 있어 편안함을 주는 오랜 친구처럼 말이다.

기사를 작성하고 집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더니, 2017년 8월 25일자 서울신문에 관련 기사가 실렸다. 이 전자자레인지는 LG전자(그때는 골드스타 즉 금성)가 무려 1983년에 생산한 최초의 오븐복합레인지였다. 예측 대로 40년이 다 된 물건. 식기건조기에 대한 정보는 아직 찾지 못했으니 비슷한 수명을 지니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다음 카카오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살림살이 #대물림 #옛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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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학원을 운영하며 브런치와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쓰기 보다 읽는 일에 익숙한 삶을 살다가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썼습니다. 신문과 책으로 세상을 읽으며 중심을 잃지 않는 균형 잡힌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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