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브가운
최혜선
그가 공부를 하는 동안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했던 나는 처음엔 곧 끝날 거라는 낙관으로 버텼다. 박사를 따면 끝날 줄 알았던 고생은 그 후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은퇴하신 지도교수님의 자리는 AI와 협업을 할 수 있는 공대 출신으로 채워졌고 강사법이 시행되면서 강사들의 설 자리는 더 줄어들었다.
대단한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 정도만 하는 사람이었으면 내가 이 고생은 안 할텐데' 그를 원망하다가 서른살의 나를 탓했다. 내 팔자는 무슨 팔자인가.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든가 대해 틈틈이 생각하고 이런저런 책을 찾아 읽었다.
그러다 읽은 책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잘 하는 사람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는 문장을 봤다. 생년월일 8자리 숫자를 더해서 나온 각자의 '소울 넘버'에 대해 이야기하는 또 다른 책에서는 남편과 나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기도 했다.
남편의 소울넘버인 5번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보존해온 비밀스러운 지혜를 세상에 전파하는 대사제 카드에 해당했다.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고자 할 때 늘 배움을 선택하는 유형이라고도 했다.
나의 소울 넘버인 8번에 대해서는 '미련맞게 그 짐을 짊어지고 가다보니 본인도 모르게 자신 안에 있는 잠재력을 키우게 되어 경제적으로나 일적으로 성공하는 사례가 많다. 의도하진 않았는데 도망가지 못하고 싸우다보니 맷집이 생긴' 사자를 길들이는 소녀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이런 잣대로 내 결혼생활을 돌아보니 나의 역할은 온달을 장수로 만드는 평강공주인 건가 싶었다. 남편의 역할은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와 함께 살면서 그로 인해 힘든 것이 많았지만 그를 선택한 서른 살의 내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나는 배에 힘 꽉 주고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능력치가 증가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이 옷 살 돈이 부족하지 않았으면 나는 옷을 만들어 입힐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옷 만들기에서 나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꼈고, 가족들의 인정을 받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렇게 뭘 모르던 시절의 내 선택에 대해 나를 설득하고 이해하면서 비로소 남편과도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그러니 담담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내려놓자고도 할 수 있었고. 미련 없이 끝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자고 덤빌 수 있었고, 마침내 꿈을 이뤘다.
남편과 결혼한 덕분에 얻은 능력으로 혼자 외국 생활을 하는 그가 그곳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파자마를 만들었다. 만드는 동안 결혼생활의 한 챕터가 닫히고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구나 싶어 기분이 묘했다.
남편 혼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인생의 장을 잘 채워가기를 응원하는 한편, 아빠 것과 같은 파자마를 만들어 달라는 아들을 위해 천을 주문했다. 가족 생활 챕터 1을 남편 파자마 만들기로 끝내고, 2를 아들 파자마와 함께 열어가 보려 한다. 두 번째 장은 뭣도 모르고 시작한 챕터 1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잘 채워가보자고 다짐하면서.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읽고 쓰고 만드는 삶을 지향합니다.
https://brunch.co.kr/@swordni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