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샷.
롯데엔터테인먼트
다시 물어보자. 정말 내가 그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춥고 배고프니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 선뜻 열어줄 수 있는가? 물론 모든 게 무너진 상황에서 그 문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겐 '문'이야말로 자신의 안전, 더 정확히는 생존을 담보해주는 무언가일 수 있다. 내 집과 내 몫에 관한 욕망이 설령 착각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그 욕망 뒤편에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황궁아파트 주민들에게 짙게 깔린 정서가 있다. 바로 타자에 대한 불신이다. 민성처럼 자기 집에 들인 사람의 눈치를 보며 불편해하는 것에서부터 모르는 누군가에게 칼 맞고 죽을 위기에 처할까봐 무서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유에서 그들은 불안에 놓인다.
황궁아파트 주민들이 특별히 나빠서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은 살고자 할 뿐이다. 인간다움의 가치가 그들의 생존을 담보해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나눔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머리로는 이해하더라도, 내 몫을 양보했을 때 그것이 호혜로 이어질지 배신으로 이어질지 확신할 수 없다.
대신 확실한 것이 있다. 바로 아파트 주민과 외부인의 경계다. 그 징표만큼 명징한 게 없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가 확실히 보이고, 불안이 안정으로 바뀐다. 그러니 문과 담장이 모두 무너져 경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해도, 다시 경계를 그음으로써 안정을 확보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인간다움을 말하는 이들은 속 편한 사람이 돼 버린다. 누구는 바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먹을거리를 구해올 동안, 저들은 그 식량을 배급받으면서 멋들어진 말이나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정서가 견고한 상황에서 '바르게 살자'는 도균의 호소는 조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위협 앞에서 사라지는 타인의 이야기
경제적 위협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삶 자체가 위험에 빠질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최근 연이은 무차별 살상 사건 이후, 예방이라는 명목으로 강화된 치안 활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느 한 중학생이 무고하게 용의자로 의심받았고 무리하게 체포되는 과정에서 크게 다치는 일이 있었다. 혜화동에서는 과거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였고 홈리스 야학에서 활동하던 분이 오토바이의 굉음에 놀라 칼을 들고 나갔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과거 그가 겪은 빈곤과 국가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그간의 사회활동과 사람됨을 참작해달라는 1015명의 탄원서가 제출됐다. 물론 흉기가 될 수 있는 물건을 지닌 채로 다른 사람이 보기에 위협적으로 비칠 수 있는 행동을 했지만, 그의 장애 특성과 생애과정을 고려한다면 구속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생의 위협 앞에서 타자가 간직한 서사는 완전히 어둠 속에 묻힌다.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안중에 없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저들이 내 안전과 생존을 저해하지 않는지가 중요하다. 치안 권력 앞에서 이야기는 속절없이 사라진다. 법적 판단과 안전과 위험의 기준만이 남는다.
그런데 정작 우리 스스로 이런 치안 권력을 욕망하게 된 건 아닐까. 단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게 사람이 할 도리예요'라는 호소만으로 충분할까? 타자의 이야기를 듣는 게 이해의 출발점이라지만, 누군가에게 귀 기울일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을까? 삶의 안정을 회복하고 싶다는 욕망을 경계 긋기와 치안 권력이 아니라 연대와 호혜의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뭐랄까. 세범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세범은 제값을 다 치르고 아파트를 샀지만 정작 사기를 당해 법적으로 등기하지 못했다. 명화 또한 아파트 주민과 비주민의 경계를 근거 삼아 세범의 정당성을 무너뜨렸고 세범의 전후 사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느 순간 세범도 영탁을 죽이고 주인 행세를 하는 바퀴벌레가 돼 있었다. 참 역설적이다. 바르게 산다는 게 도대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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