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대단한 사람이 되었네"

지역 생방송에 출연한 말랭이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등록 2023.09.25 08:42수정 2023.09.2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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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대단한 사람이 되었네
- 김정엽


오십 년 전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득하기만 하네
그때는 고생이 뭔지 불행이 뭔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네
더 많은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자식을 굶기지는 말아야지 그 생각뿐이었지
(중략)
생각도 못했던 KBS 아침마당 생방송
주름진 내 얼굴이 흉하지는 않을까 두렵기만 하네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존경했는데
드디어 내가 나왔네
나도 대단한 사람이 되었네


말랭이마을 동네글방에서 한글수업에서 시 쓰기를 배우는 김정엽(77) 어르신의 시다.

며칠 전 말랭이 동네글방, 한글을 배우는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방송에 담아보자는 방송작가의 전화를 받았다. 글방수업을 지도하는 나는 어머니들의 공부에 대한 열정과 과정, 그리고 결과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방송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지난 3월부터 7개월째 그림에세이 작가 김정희 선생님과 함께 수업을 진행 중이다. 동네글방에 입학한 마을 어머니들의 한글배움에 대한 즐거움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 마을 이곳저곳에 시를 쓰는 사람들이 꽃이 피우고 웃는 모습으로 날마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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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전주 KBS아침마당 출연 말랭이마을 어른들과 입주작가3인이 방송에 출연, 마을을 소개하고 있다 ⓒ 박향숙

 
지역의 생방송 <아침마당>의 출연이 결정되고, 마을인 대표로 두 명의 어머니가 손을 들었다. 두 분 모두 동네 마을잔치행사나 경로당 운영 등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분들이다. 당연히 한글공부 시간에도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선생의 말 토씨 하나도 빼놓지 않고 수업에 참여한다. 주제가 있는 과제 제출도 지금까지 한 번을 거른 적이 없다.

김정엽 어른은 가난한 집안 8형제 맏딸로 태어나 7명의 남동생 뒷바라지를 했다.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한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수업시간, 배움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원망도 섞고, 때론 푸념도 토하며 지금부터라도 배우면 된다고 바로 긍정모드로 돌아간다. 부자집 딸로 태어나 공부해서 꼭 정치인이나 법관이 되어 사회의 부조리를 다 없애고 싶다고 말한다.


이덕순 어른은 초등학교 이후의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멀리 강원도에서 군산으로 시집온 후 새벽 생선장사 40년을 했다. 수업시간 중 글 주제로 '손'에 대한 시를 쓰는 시간이 있었는데, 당신의 손을 그린 후 손에게 당신마음을 얘기했다.

'손아 손아 나를 만나 고생했다. 생선장사 40년, 비가오나 눈이오나, 갈치사세요, 젓갈사세요, 고기사세요를 외치는 소리따라 너도 고생 많았다. 그러나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손. 자랑스러운 손, 바로 이덕순의 손.'

방송 일주일 전 말랭이마을에서의 두 분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방송작가와 피디는 방송에서 나눌 대본을 보내주었다. 두 분은 대본의 양이 너무 많아 기절할 것 같다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오메, 이것이 무슨 글자랑가. 이렇게나 많은 것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한당가. 괜히 헌다고 했네. 생방송이라는디, 우리가 방송 다 망쳐먹으면 어쩐당가."

그때부터 어른들과 나는 대본 읽기와 말 주고받기를 연습했다. 한번 읽고 두 번 읽고, 열 번 읽고 백번 읽으면 저절로 대본이 입에 달라붙을 거라고 했다. 방송 아나운서들은 프로들이니, 우리가 실수해도 다 알아서 바로바로 재밌게 대화로 이끌어 줄거라고 하며 어머니들을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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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현장을 보고 신기한 어른들 방송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방송현장을 두리번 거리시는 마을 사람들 ⓒ 박향숙

 
드디어 방송의 날. 새벽 6시, 두 분을 모시고 방송국으로 출발했다. 처음으로 방송국에 들어간 어머님들은 분장도 받고, 리허설도 해보며 긴장을 풀었다. 방송에서 낭송할 시 두 편 씩을 준비하고 몇 날 동안 낭독연습을 했다. 프로그램의 오프닝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아나운서들의 인사말 후, 어머님들의 각자 소개 사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1시간 5분이라는 생방송을 마쳤다.

마을과 마을잔치역할을 소개하고, 동네글방을 통해 배운 시 수업 얘기와 준비해온 시 낭독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대담하고 자신있게 말씀하는 어머님들을 보면서 수업을 지도한 나는 가슴뭉클했다. 아, 가르친다는 것은 배우는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가 있구나 싶었다.

돌아오는 길, 정엽어머님의 아들은 서울에서 방송을 보았다며 '우리 엄마, 너무 멋지고 대단한 사람 맞아요. 엄마 사랑합니다. 지도선생님에게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라는 말이 수화기를 넘어서 들려왔다.

동네 사람들은 점심상을 차려 놓고 우릴 기다렸다. 동네 자랑 잘했다고, 텔레비전에 이쁘게 나왔다고, 떨지도 않고 말도 참 잘하더라고 칭찬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말랭이 마을이 일약 스타가 된 하루였다.
#말랭이마을 #KBS아침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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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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