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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섬에서 발견된 산지습지

[서해의 보석, 신안 천사섬 6] 습지 덕에 물 부족 없이 살아온 장도 사람들

등록 2023.09.28 19:34수정 2023.09.2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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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기자말]
흑산도는 흑산군도(群島) 크고 작은 섬들의 교통 행정 중심지다. 목포에서 달려온 쾌속선이 흑산도 예리항에 닿으면 이웃 섬들로 가는 작은 도선(渡船)들이 기다리고 있다. 예리항에서 20분가량 가면 장도(長島) 선착장에 닿는다.

장도 가는 도선에서 손님이라곤 우리 둘과 해녀(海女) 두 명이 전부여서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40, 50대로 보이는 여인들은 낯을 가리지 않고 외지인에게 바다의 삶에 대해 술술 이야기를 해주었다. 장도의 한 해는 이른 봄부터 시작한다. 봄 한 달은 까나리를 잡고 7월부터 12월까지 멸치잡이를 한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날에 그물을 던져야 멸치가 많이 올라온다. 배 뒤에서 파도가 치면 배가 뒤집힐 듯 요동을 치는 바람에 혼절할 것 같다. 절이나 교회를 안 다니는 여인들도 밤에 멸치잡이 나갈 때는 기도를 드린다.

멸치액젓은 천연 조미료다. 간장 대신에 멸치액젓을 쓰면 음식의 감칠맛이 깊다. 멸치 액젓을 담가서 5년 숙성을 시켜야 제맛이 우러난다. 우럭 양식도 주요 소득원이다.

장도의 우럭은 앞바다에서 잡은 생물 멸치를 먹고 자라 자연산 우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멸치는 우럭에게 쌀밥과 같다. 해녀들은 멸치잡이 외에도 미역과 전복 해삼 채취로 살림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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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다본 장도습지. 장도를 둘러싼 해식애가 절경이다 ⓒ 신안군

   
두 개의 섬이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장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큰 섬이 대장도, 작은 섬이 소장도. 하루에 두 번 간조 때가 되면 바닷물이 빠지면서 두 섬이 연결된다. 소장도에 두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모두 대장도로 넘어와 무인도가 됐다.

대장도 마을에는 35가구 60여 명이 산다. 지붕은 모두 주황색이다. 신안군이 경관 조례 시행규칙을 제정해 마을의 지붕을 섬별로 같은 색깔로 칠해 통일적인 색감을 구현했다. 군에서 페인트 비용을 지원한다.

장도마을에서는 장도습지를 '뒷산'이라고 부른다. 그저 마을 뒷산으로 알았다가는 혼쭐이 난다. 45도의 급경사 길이다. 장도습지 해설사 김창식(76)씨는 평지처럼 훨훨 걸어갔다. 장도 토박이인 그는 베트남 역전의 용사.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중동에서 건설노동자로 6년 일했다.


내 나이를 물었지만 결례를 무릅쓰고 안 가르쳐줬다. "젊은 사람이 70대 노인을 못 따라오느냐"는 핀잔을 듣기 싫었다. 그는 나와 보조를 맞추기가 답답했던지 한참을 앞서가다 멈춰 서곤 했다. 손님들을 안내하면서 한 달이면 스무 번은 장도습지를 올라온다고 했다. 숨을 헐떡이며 깔딱 고개를 넘어서니 산 정상에 광활한 습지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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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도의 장도마을 전경. 오른쪽은 간조때 대장도와 이어지는 소장도. ⓒ 황호택

 
조류협회 회원들이 등산왔다 발견

2003년 조류보호협회 회원들이 대장도에서 고산(高山) 습지를 발견해 세상에 알렸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발견'했다고 하면 섬 주민들에게 고깝게 들릴지 모르지만 국내 최초로 섬에서 발견된 산지습지였다.

273m 정상에 2만7천 평 습지가 조성돼 있다. 2004년 환경부가 습지 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2005년에는 창녕 우포늪, 대왕산 용늪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등록된 람사르 습지.

산 정상에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물이 흐른다. 장도습지는 섬 양쪽 봉우리 사이에 옹배기처럼 파인 곳에 형성돼 있다. 과거 대장도 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하던 집수정(集水井)정이 남아 있다.

주민들은 습지 한가운데 솟아나는 용천수에 파이프를 연결해 마을까지 끌어와 식수로 사용했다. 환경부가 습지 보호지역으로 지정하면서 골짜기 물이 바다로 빠지는 작지기미에 저수지를 만들어주었다. 지금은 이 물을 식수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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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도와 소장도 사이에 있는 암반 해안. 밀물 때면 물에 잠긴다. ⓒ 신안군

 
장도 사람들은 습지 덕분에 오랜 세월 가뭄 때도 물 걱정 없이 살아왔다. 홍도에 담수화 시설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장도로 물을 구하러 왔다. 요즘 서남해안의 도서들이 심한 가뭄을 타고 있는데도 장도습지 저수지에는 물이 찰랑거린다. 정자가 있는 곳에서부터 신우대 숲길이 시작된다. 신우대 숲으로 걸어가면 사람의 키가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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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습지의 신우대 숲길은 사람 키를 훌쩍 넘는다. ⓒ 황호택

   
해설사가 어렸을 때 마을에서는 신우대 숲이라고 했는데 습지가 알려지고 외지 사람들이 오면서부터 조릿대라는 말을 썼다고 했다. 인터넷에 떠 있는 장도습지 글에는 조릿대 숲길이라는 표현이 많다.

땀을 식힐 때 담양군 대나무 자원연구소에 사진을 보내주고 문의하니 '신우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더러 조릿대가 섞여 있다'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사람 키를 넘는 대나무는 신우대이고 키가 무릎 근처에 오는 대나무가 조릿대다. 신우대는 옛날에 화살을 만드는 데 썼다. 산죽(山竹)이라 부르는 조릿대로는 소쿠리를 만들었다. 지방에 따라 조릿대와 신우대라는 말을 병용한다고 사전에 나와 있다.

습지에서 돌멩이를 들추면 1급수 지표종인 5cm 크기의 가재가 기어 나온다. 가재는 달팽이, 유충, 벌레, 올챙이를 잡아먹고 산다. 장도에는 천연기념물인 매와 수달, 흑비둘기, 솔개, 조롱이 등 다양한 날짐승 들짐승이 살고 있다. 식물 294종, 조류 94종, 포유류 7종 등 500여 종이 분포한다. 멸종위기종인 흰꼬리수리와, 흑산도비비추, 참달팽이가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

산 정상에 습지가 형성된 것은 신비로운 자연의 조화다. 장도 산정(山頂)에는 물을 흡수 보존하는 이탄층(泥炭層)이 존재한다. 이탄층은 식물이 죽은 후 썩지 않고 수백 년 동안 쌓여 형성된 지층. 이탄층은 저수지와 수질 정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동물들에게 서식지를 제공한다. 이탄층 위의 풀밭을 밟아 주면 스폰지처럼 물이 스며 나온다.

장도습지에는 10마지기가량의 논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습지 한가운데 움막을 짓고 살며 논농사를 지었다. 마을 사람들이 보리와 고구마로 연명할 때 유일하게 쌀농사를 짓던 논이다. 할아버지가 논농사를 그만두자 습지는 소 방목장이 되었다.

논농사는 수분이 충분히 공급되고 점토(粘土)층 같은 불투수층이 있어 물이 잘 안 빠지는 토질이라야 가능하다. 논으로 이용되기 앞서 최소한 수백년 전부터 장도습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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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 올려다 본 장도습지. 이곳에 해무가 끼어 수분을 공급해주는 날이 많다. ⓒ 신안군


장도습지의 정상은 오목하고 하류부는 계곡. 장도 정상 중앙부에 위치한 습지는 화강암, 주위를 둘러싼 산지는 단단한 규암이다. 화강암이 규암보다 빨리 침식해 중앙부가 옹배기처럼 오목한 모양을 만들었다. 주위 규암에서 침식된 모래 등이 빗물에 씻겨 내려 습지를 형성했다. 비가 오면 빗물이 대부분이 모래입자와 점토의 함유율이 많은 사질(沙質) 토양에 침투한다.

식물이 썩으면 분해되어 사라지는데 장도 정상부 경사는 5도 미만으로 완만하여 차디찬 계곡물이 서서히 흘러 식물의 분해를 더디게 한다. 장도에는 이탄층이 70∼80cm 깊이에 잘 보전돼 있다. 이탄층의 방사성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1640~1960년으로 분석됐다. 3백 년에 가까운 연륜이다. 이탄층을 떠받치는 기반 암석은 화강암이다. 물이 잘 빠져나가는 암석층이었다면 이탄층이 있더라도 습지가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난류의 길목이라 해무가 늘 끼어

장도습지에 수분을 일정하게 공급하는 데는 해무(海霧)도 큰 몫을 한다. 장도는 한국 서남부를 통과하는 난류의 길목에 위치해 해무가 늘 끼어 있다. 지형적 특성으로 1년 내내 남쪽에서 바람이 지나가고 구름은 산 정상에 머무른다. 해무는 수분 공급과 동시에 습지 수분의 증발을 억제해 주는 역할도 한다. 이탄층, 화강암, 해무는 장도습지의 3대 공신이다.

흑산도 인근 지역은 연평균 강수량이 1000mm 내외밖에 안 되는 소우(少雨) 지역. 그런데도 장도에 물이 풍부하고 논농사까지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이 습지 덕분이다. 움푹 패인 와지(臥地) 지형도 물을 장시간 저장하는 기능을 한다. 그 속으로 바다 안개가 날이면 날마다 밀려들어 온다. 장도의 불투수층 토양은 수분을 오랫동안 유지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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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습지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물을 담아두는 저수지. 마을 주민들이 식수와 생활용수로 쓴다. ⓒ 김창식

 
장도습지는 미나리, 천남성, 엉겅퀴, 억새, 구슬잣밤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찔레꽃, 산딸기 등이 자라는 자연 식물원이다. 그런데 방목을 금지하면서부터 버드나무 군락이 나타나 습지의 육지화를 가속하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버드나무 군락의 존치 여부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나뉜다.

천연기념물 수달이 여기서는 어민을 괴롭히는 액물이다. 수달은 하천이나 호수 같은 민물에 살지만 이곳 수달들은 바닷물에 적응을 해 가두리 양식장의 우럭과 볼락을 잡아먹는다. 지능이 뛰어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물망을 뚫고 들어간다.

수달에게 어두일미(魚頭一味)는 통하지 않는다. 고기를 물면 머리를 남겨두고 몸통의 살만 뜯어 먹는다. 수달의 식습관을 보더라도 어두일미는 옛날 생선이 귀할 때 머리에 붙어 있는 작은 고깃점까지 젓가락으로 파먹게 하려고 만들어낸 말 같다.

저수지가 있는 작지기미에서 장도마을까지 1km 신우대 숲길이 이어지고 그 밑으로는 바닷물에 수천년 깎인 해식애(海蝕崖)가 펼쳐진다. 해변 신우대 숲길은 환경부가 안내판도 붙여놓고 위험한 곳에는 데크도 깔아놓았다. 해설사는 환경부의 관리와 지원을 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해식애가 장도습지를 둘러싸고 있는 드론 사진을 보면 천하의 경승(景勝)이다.

바람이 없는 날은 흑산도와 대장도 사이의 바다가 흡사 강처럼 흘러간다. 홍도는 개울 건너 이웃처럼 가깝게 보인다. 장도습지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다음에 올 때는 장도에 해무가 낀 모습을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최광희 최태봉, <신안 장도습지의 지형과 퇴적물 특성>, 한국지형학회지 제17권
제2호, 2010
신안군 홈페이지, 장도 람사르 습지
(https://www.shinan.go.kr/home/www/about/about_13/page.wscms)
EBS, 섬 속의 늪, 장도습지를 가다
(https://www.youtube.com/watch?v=gwe40N0oqQA)
#신안 천사섬 #장도습지 #대장도 #소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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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탐사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두해 연속 수상했다. 저서 '박종철 고문치사와 6월항쟁'은 언론 지망생들의 필독서 반열에 들었다.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황호택이 만난 사람을 5년 5개월동안 연재하고 인터뷰 집을 7권 펴냈다. 동아일보 논설주간, 서울시립대 초빙교수를 지냈고 현재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 대학원 겸직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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