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의 리듬으로 삽니다
자음과 모음
방송작가인 저자는 비혼으로 엄마와 함께 지내며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엄마와의 일상을 기록했다. 두 여자가 함께 어깨를 기대 살아가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
나는 특히 저자 모친의 언어들이 좋았다. "사람이 나쁜 일만 생기지 않아, 아무리 큰 어려움도 십 년은 넘기지 않는단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쌀로 밥 짓는 소리"처럼 뻔하지만,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기에, 지난한 삶을 관통한 힘을 가졌기에 그의 언어는 보석 같다.
방송국에서 막 잘리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나 일이 너무 안 풀린다고 생각될 때 엄마는 항상 내게 이렇게 말했다. "견디다 보면 좋은 날이 와" "끝을 잘하고 나와야 해" 사람들과의 관계를 좋게 마무리하고 나오란 뜻이었다. 그땐 엄마의 그 말이 참 와닿지 않았다. 내 나이가 이렇게 많으니 견디기만 하다 좋은 날이 오기도 전에 할머니가 돼서 내 인생이 '쫑'날 것만 같았다.
그런 마음의 저변에는 '난 이렇게는 못 살아' 하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릴 부정하니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그놈의 좋은 날은 도대체 언제 와? 다 늙어서 오면 뭐 해?"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냥 견디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고 '좋은 날'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날인지도 헷갈렸다.
돌이켜보면 내가 바란 좋은 날이란 보란 듯이 잘 사는 삶이었던 것 같다. 잘 안 풀리고 시들거리는 내 자존심을 세워서 번듯한 자리로 인도해주는 역전승 같은 삶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날을 바랄 때는 내 삶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대로 내 마음속에 일던 폭풍이 잠잠해지고 그냥 지금처럼 살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행복을 느끼는 빈도가 늘었다.
바로 그게 내가 바라던 좋은 날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방송국에서 일할 일은 없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고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잘해서라기보다 서로 끝이 좋았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와" 내가 어딨는지 알 수 없었던 백수 생활 때, 나만 낙오되고 소외되고 뒤처진 느낌이 들어 괴로웠을 때 엄마의 이 말은 공허하게 들렸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규칙을 만들고 삶의 최선을 다하면 그 시간은 버텨진다. (중략) 그렇게 버티다 보니 좋은 날에 이르렀고 돌이켜보면 그때도, 지금도 좋은 날이다. - 132~134p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고 간절히 바라도 안 되는 일도 있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간절함이 덜해서도 아니다. 그냥 그런 거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퇴로를 찾자. 그 퇴로가 우릴 어디로 데려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건 안 되더라도 너무 좌절하지 말라는 뜻이고, 퇴로라고 생각했던 길이 또 다른 고속도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이고, 힘을 빼는 순간 또 다른 문이 열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길도 길이고, 저 길도 길이다. 그리고 길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멈추지 말고 길을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꿈이야 이뤄지든 말든 놓아두자. 이건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 내게 하는 다짐이자 어느 순간에도 주저앉지 말라고 나를 다독이는 말이다. 그래야 모든 도전이 행복할 수 있고 매 순간 좋은 날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솔직한 자기 직시의 힘
저자가 딱 마흔이 되던 해, 수많은 회사에서 광탈하고 겨우 구한 자리는 도넛 가게 알바였다. 나이 많고 고학력은 부담스러운 존재. 감사하고 기쁠 줄 알았던 첫 출근날, 지하철에서 내린 저자는 눈물을 흘렸다.
이내 일에 적응하면서 몸도 마음도 여유가 생길 무렵 후배가 가게 앞을 나가는 것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늘 언니를 닮고 싶다는 후배. 그 말속에는 사회적으로 번듯한 모습이 포함되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데서 일할 것 같게 생기지 않았다는 사장님의 말처럼 나는 이런 곳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의식이 계속 있었던 탓에 후배의 등장으로 비대하기만 할 뿐 뿌리가 단단하지 못했던 내 자아는 또 무너졌다. 내가 다다르고 싶었던 곳과 지금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곳과의 괴리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닥친, 무서운 재난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을 할 때였다. (중략) 결국 나는 항복했다. 그러자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가 아니라 나라고 왜 아닌가?"라는 말이 내 마음속에서 툭 튀어나왔다. - 102p
맞다. 왜 나라고 아닌가. 나라고 소나기를 피해 갈 수 있나? 말은 쉽지만, 정작 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어렵다. 저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몸서리치게 부대꼈을까 싶으니 마음이 아팠다. 그건 과거 내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프랜차이즈 햄버거집에서 알바를 끝내고 버스에서 내렸을 때 모친이 강아지와 함께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모습에 저자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을 흘렸다는데 그 심정을 알 것 같아서 나도 울었다. 나이 들면 통장에 돈이 늘어야 하는데, 어떻게 난 눈물만 는다.
솔직한 자기 직시의 힘이 느껴지는 책이다. 쳅터 사이사이 나와 내 가족의 관계를 돌아보게도 했다. 그리고 나의 A급 부친에 관해, 기록하고 싶다는 강렬한 생각도 들었다. 참말이다. 부친께 전화해야겠다. 요새 입맛이 없으시다는데, 뭐 드시고 싶으신지 여쭤야겠다. 그리고 그때 '크레이지 러브'를 왜 그렇게 불러대셨는지도 이참에 물어야겠다.
또 명절이다. 긴 연휴에 가족끼리 고스톱 치다가 마음이 상하거든 이 책을 읽으며 내 부모, 내 동거인에 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맞고 상대가 틀려서 분한 마음이 들 때 '지금이 좋은 날'인 걸 잊지 않았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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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가족끼리 고스톱 치다가 마음이 상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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