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관계로 배수진을 쳤다
유신준
사부는 어떤 경우든 사과하지 않는 존재라 했으니 혹시 간접사과인가? 이 정도로는 안되지. 감정을 풀려면 원인을 밝히고 제대로 사과를 해야 풀리든지 말든지 하지. 대충 넘어가는 건 어림도 없다.
이 양반 내가 얼마나 뒤끝이 질긴 놈인지 아직 모르시는군. 사람 잘못봤네요. 내가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사부한테 일은 배우겠지만, 어제 당한 수모는 배우는 일이 끝나는 날까지 두고두고 갚아 드릴테니까 기대하시라.
당신께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치신다면 이쪽도 그다지 물렁한 놈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사제 간 구색이 맞을 것 아닌가. 이후 발생할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원인 제공자인 사부에게 있음을 밝혀 두겠소. 나는 포커페이스 같은 거 절대 못하는 단순한 인간이다. 얼굴은 굳어지고 입이 굳게 닫혔다.
그렇다 해도 위계가 분명한 사제관계에서 내가 취할 방법은 많지 않다. 물론 일을 태만히 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다. 내가 완성한 일의 품질을 떨어트리는 것은 제자의 우수함에 금이 가는 일이니까. 내 개인적인 명예와도 관련되는 거다. 그건 안되지.
되갚아 줄 방법은 한 가지다. 말을 최소 한도로 줄이는 것이다. 답변은 짧게 하이! 끝. 전에 있었던 밝고 쾌활하며 싹싹했던 제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즐겁게 일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인 사부에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 될 것인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기대 만빵이다.
물이 오를대로 오른 바리캉 솜씨
철쭉 둥근 다듬기는 어느 정원이든 준비된 일거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구든 좋아하는 일은 잘 할 수밖에 없다. 하고 싶은 마음은 뭐든 잘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는 거니까. 게다가 경험치를 축적한 내 바리캉은 이미 물이 오를대로 올랐다.
요즘 내 작품을 보면 사부도 항상 엄지 손가락을 내밀며 오케, 오케를 연발했다. 그것조차 시들해져서 이제는 아무 말도 안 하는 수준까지 됐다. 만일 달덩이 두부깎기 종목이 올림픽에 있다면 출전이라도 하고 싶다. 60년 경력 사부가 봐도 어디하나 흠 잡을 데가 없으니까.
완벽한 일처리 방침은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을 궁리이기도 했다. 어딜 봐도 도대체 흠잡을 데 없이 일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다. 작업 부산물 같은 걸 처리할 때도 그렇다. 제법 무거워 허리에 무리가 가는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불끈불끈 들어서 척척 처리한다. 성실하게 일 잘하는 걸 몸으로 보여줘야 하는 거다. 내가 없으면 불편해서 못 견딜 정도로 존재감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거다. 줄곧 그런 생각으로 일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