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관아
곡성군청
그렇다 해도 고통은 고통이고 역경은 역경이다. 천국으로 가기까지 견뎌야 할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교우의 배교(믿던 종교를 버림)는 믿음을 뒤흔든다. 배교는 종교를 버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교우를 일러바친다.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자식을 죽이겠다는 위협에 굴복해 발설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대비하지만 사람 사이를 파고드는 의심에 공동체는 분열한다.
평생을 천주교인 잡아들이는 데 바친 좌포도청 종사관 금창배는 붙잡혀 온 교인들 무리에서 한 사람씩 끌어와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뼈가 부서지는 치도곤을 때려 말하게 하는데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남은 교인들은 술렁이게 된다.
저 사람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이야기엔 고개를 갸웃거렸고, 처음 듣는 이야기엔 그토록 친하게 지냈는데 왜 저 이야길 내겐 하지 않았을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기도 했다.(2권 162쪽)
이와 같은 극한의 상황과 비교할 바는 아니라 해도 사람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저 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돌아서고. 이것이 바로 천주교인 취조에 이골이 난 금창배의 노림수였다.
천주교인을 처형하면 치명자('치명'은 순교의 옛말)라 해서 남은 천주교인들이 죽은 자를 추앙하므로 금창배는 죽이지 않고 배교하도록 한다. 나아가 배교자 중에 간자(間者, 첩자)를 만들어 교우촌에 침투시켜 파괴 공작을 한다. 배교자와 간자로 교우촌은 파괴되고 교인들은 흩어진다.
친구와 갈라서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사소한 오해, 순간의 실수, 용서 못 할 잘못 등으로 관계가 멀어지면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믿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았을 때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을(뒤통수 맞았다는 사람은 많은데 뒤통수쳤다는 사람은 없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예수야말로 뒤통수 제대로 맞은 사람이다.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수가 처형당한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온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이자 초대 교황이 되는 베드로는 첫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다.
평생의 믿음이 깨진 '불신 지옥'이었지만 <사랑과 혁명> 속 인물들은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 관계를 이어간다. 회두(가톨릭에서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옴을 뜻하는 말)한 이들도 있지만 회두하지 않고도 각자의 처지를 인정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쫓고 쫓기고, 알아내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의 숨 막히는 심리전이 펼쳐지고,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이 많이 나와 천주교 소설이 아닐까 싶은 이 많은 이야기가 향하는 곳은 결국 한때 믿음을 저버렸어도 다시 함께하며 서로 돕고 사는 인간이 희망이라는 것이다.
거짓말꾼과 무당 그리고 좌포도청 종사관
이 책은 천주교인의 수난을 다루지만 천주교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말하지만은 않는다.
'모독'이라는 인물은 천하제일의 거짓말쟁이로 그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에 자부심을 가지고 최고의 거짓말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그가 오병이어(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듣고는 뛰어난 거짓말이라고 칭찬한다.
무당인 '금단'은 교우촌 회장에게서 예수가 물 위를 걸었고 베드로도 따라서 물 위를 잠시 걷다가 갑자기 겁을 먹어 물에 빠졌다는 성경 구절을 듣고는, 시퍼런 작두에 올라서 펄쩍펄쩍 뛰고 난 뒤 내려와 자기처럼 해보라고 한다. 교우촌 회장이 발을 들어 내미는가 싶다가 물러서자 금단은 '베드로가 왜 겁을 먹었는지 알겠지?'라고 한다. 금단은 또 신이 하나뿐이라는 말에 옹졸하다며 신들끼리 서로 존중하며 지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좌포도청 종사관 금창배는 왜 그리 천주교인을 잡아들이는 데 모든 것을 바치느냐는 물음에 천주교인들이 천주 앞의 평등을 말하지만 "천주교에는 영원한 차별이 있으니 그것은 곧 천주라는 신과 그 신이 만들었다는 피조물인 사람 사이의 차별"이라고 말한다.
그는 "군자는 제아무리 강력한 권세를 지닌 군왕과도 대등"하고 "천주를 포함하여 그 어떤 신 앞에서도 군자는 대등하게 묻고 답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며 "공맹의 도리에서 사람은 그처럼 높고 아름답고 당당한 자리에 앉았"는데 "천주교에서 사람의 자리는, 설령 성인으로 추앙받는 자들이라고 해도, 천주에 비하면 하찮고 하찮을 따름"(2권 189쪽)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 의식이 눈에 띄지만 그렇다고 천주교인들의 고난과 희망의 이야기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2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어떻게 살지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