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쯤 가려지는 위치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느끼게 해줍니다.
유신준
장지에 비치는 대나무 잎 그림자로 밖의 햇살이나 바람을 느낍니다. 한껏 모양을 낸 둥근 창 너머로 사쿠라의 굵은 줄기와 흩어져 가는 꽃잎만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벚나무를 떠올리게 되는 건 전통적인 일본 정원의 연출 테크닉이죠.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뤄 좋은 정원이 만들어지는 거죠. 그 중 하나의 요소에 눈을 빼앗겨 조화를 해치고 있는 건 아닌지 거리를 두고 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돼요.
정원 디자인이란 게 어떤 나무를 얼마나 심느냐는 것만 치중하지는 않아요. 아무것도 심지 않는 디자인도 있으니까요. 마이너스 디자인이죠. 오래 전에 제가 설계한 작업중에 넓디 넓은 정원에 잔디를 깔고 잡목 두어 그루로 마무리 한 경우가 있었어요.
낡은 창고를 없애지 않고 약간 바꿔서 의뢰인이 좋아하는 색으로 도색했어요. 문을 바꾸고 어닝을 설치해서 넓은 느낌을 살리려 했죠. 이 창고를 포인트로 해서 나무를 몇 그루 심고 가능하면 넒은 느낌을 살리려 한 디자인이거든요. 이 경우는 나무가 주가 되는 게 아니고 양념이죠. 나무도 없으면 황량하니까 몇 그루 끼워넣는 거죠.
그곳은 의뢰인이 기르는 완짱(개) 놀이터이기도 했거든요. 주인이 개랑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의도로 만든 디자인이죠. 어닝 아래 테이블을 펼쳐 놓고 차를 마신다든지 하는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도록 만들었죠.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한가요?) 약간 달라요. 이 작업은 넓은 잔디밭에서 개를 키우고 싶다는 기본 조건이 있죠. 아무 조건도 없이 제로에서 시작하는 정원 디자인은 없어요. 그림을 그린다면 아무 조건 없이 시작하지만 정원 설계는 처음에 일정한 조건이 주어지는 거니까 그림과는 다르죠. 주어진 조건을 정리해 나가는 중에 일이 절반 정도 끝난다고 보면 되죠.
일본 전통정원은 대개 사용하는 게 아니고 방에 앉아 바라보는 용도거든요. 목적이 완전히 다르죠. 나는 일본정원도 가능하면 바라보는 것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걸 목적으로 디자인하고 싶어요. 요즘 건축되는 신형주택의 경우에는 의뢰인의 개성들이 뚜렷해서 보는 정원과 사용하는 정원이 융합되고 있긴 하지만.
(디자이너와 이야기하는 중에 의뢰인의 생각이 바뀌는 경우도 있겠군요) 의뢰인이 하고 싶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무리인 것도 많거든요. 나무에 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이 나무가 좋으니까 심고 싶어요' 하거든요.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싶어서 모미노기(소나무과의 상록침엽수, 혼수 시코쿠 큐슈에 자생 일본 특산종)를 심고 싶다는 의뢰인의 요구가 있었어요. 그 나무는 주택지에서는 심을 수가 없거든요. 몇 십미터까지 한없이 자라는 나무니까.
그런 의뢰라면 사정을 설명하고 가능하면 그와 비슷한 조건으로 맞출려고 노력하죠. 때로는 토목공사와 관련된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디자이너의 책임이기도 하니까(어려운 작업이네요 어려운 만큼 재미있어 보이는 작업이기도 하고).
아까 낡은 창고 디자인으로 다시 되돌아갑니다만 원래 너덜너덜한 창고였어요. 문 앞에 테라스를 만들고 식재문제는 공간 디자인의 한 분야기도 하죠. 같은 높이가 안되도록 공간의 밸런스를 맞추는 거죠. 나무 아래에 네지메(하부가림)로 초화류를 심기도 하고 원근감을 만들기도 하죠. 하나미즈키(꽃산딸나무)를 넣기도 하고 삼각형으로 큰나무 작은 나무를 조합하게 되죠. 공간 디자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