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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살갑게 다가오는 말은 당근을 더 주고 싶다

타인에게 예의를 갖추는 행동은 결국 나에게 돌아옵니다

등록 2023.11.21 08:35수정 2024.01.2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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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은 제주도에 사는 말 수의사입니다. 사람보다 말을 더 사랑하게 된 이유를 글로 씁니다.[기자말]
2023년 화두에 가장 많이 올랐던 드라마 중 하나는 단연 넷플릭스 <더글로리>다. 학교 폭력과 복수 스릴러라는 흥미로운 전개와 배우들의 열연으로 방영 당시 연일 화제에 올랐고 나 역시 흥미롭게 보았다.

그런데 총 16화의 강렬한 복수 스토리 중에서, 나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장면은 남들과 완전히 다르다.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로 2부 첫 화에 나오는 하도영이 문동은의 집 안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찰나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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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영의 신발 신발이 연기한다는 그 장면 ⓒ 넷플릭스

 
하도영은 문동은에게 가학적인 학교 폭력을 저질렀던 박연진의 남편이다. 하도영이 처음으로 문동은의 영역인 집 안으로 들어갈 때, 그는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직전에 들어왔던 박연진은 신발을 신은 채로 자연스게 방 안으로 들어왔고, 피우던 담배를 방바닥에 비벼 뭉개기도 했다.


그 모든 장면을 문동은이 CCTV로 확인하고 있다. 문동은은 학창시절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가해자인 박연진에 대한 복수심 하나만으로 치열하게 복수만을 준비해 온 인물이다. 그런 문동은이 2부 첫 화에서 돌연, 지금이라도 자신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면 복수를 멈추겠다고 용서의 기회를 주게 된다.

왜 갑자기 상대에게 먼저 용서의 기회를 주는 걸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생을 복수를 준비해 왔으니 이제 실행만 하면 되는데, 왜 문동은은 갑자기 가해자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준 것일까? 의외의 포인트에서 답이 있었다.

그건 하도영이 신발을 '벗고' 문동은의 방 안으로 들어간 장면이 문동은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이다.  그 당연한 행위가 문동은의 마음을 살짝 흔들리게 했고, 그 사소한 흔들림이 박연진에게 사과의 기회를 주게 되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그 디테일한 심리 변화가 크게 와닿아서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 진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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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로리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하도영을 CCTV로 확인하는 문동은 ⓒ 넷플릭스

 
나는 '인사 공손히 해라', '어른에게 대답 잘 해라'라는 말을 어렸을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하지만 학창 시절의 나는 사실 인사를 잘 하지 않았다. 어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자체가 그냥 싫었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소심하게 끝을 흐리며 말을 뭉개는 게 일상이었고, 나와 달리 싹싹하고 인사성 밝은 아이들이 그냥 짜증났다.

그런데 직장에 와보니 모든 직원들이 '다나까' 말투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주위에 그런 남자 밖에 없던 시절이어서 나는 저절로 군대식 인사를 배웠다. 내 기분이 좋건 싫건 간에 상사가 출근하면 '안녕하십니니까'라고 크게 이야기하고, 상사가 집에 갈 때는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어느새 나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인사가 당연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요즘 출근길에 자주 만나게 되는 이웃이 있는데 내가 인사를 하면 항상 겨우 목소리를 내며 말끝을 흐린다. 마치 마지못해 인사를 하는 척 하는 학창 시절의 나 자신 같다. 그래도 아침에 가장 먼저 인사하게 되는 사람인데,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면 내 텐션도 사그라든다. '에이, 내 인사를 받아주기도 귀찮은가 보다. 내일은 그냥 나도 무시해야지'라는 생각이 들며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가장 먼저 앞선다. 사실 누군지도 모르는데 앞으로 마주치면 먼저 피할 것 같은 선입견도 생겨버린다.


회사에 도착하면 청소하는 아주머님을 가장 먼저 만난다. 언제나 그 분은 하이톤으로 인사를 받아준다. 아니 인사를 받기도 전에 이미 웃음이 얼굴에 피어있다. 그러면 나는 또 거기에 장단을 맞추며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인사를 하게 된다. 나는 그 분이 어떤 사람인지 사실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내일도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마음이 움직여버린다.

더 웃긴 것은 동물에게 느끼는 감정도 똑같다는 것이다. 동물병원 밖의 야외 울타리에 서 있는 말들 중 유독 나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말이 있다. 어쩔 때는 저 멀리서 나를 보고 막 달려오기도 한다. 물론 그 녀석은 유독 사람에게 호기심이 많거나, 밥을 먹고 싶어서 달려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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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많은 말 ⓒ 김아람

 
그럼에도 나는 그 모습에 더 눈길이 가서, 다음에 꼭 먹을 거라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물며 나에게 호의적인(?) 동물까지도 이렇게 호감이 가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빛 갚는다', '웃는 낯에 침뱉으랴' 등의 오랜 속담과 격언이 있다. 타인을 향해 웃고,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라는 가르침은 오래 전부터 인류가 깨달은 진리인 것이다. 대단하고 복잡한 내용이 아니어서 나는 진리에 둔감해 있었다.

'예의'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남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것은 돈 한 푼 들지 않는데도 돈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결국 '예의'는 나의 첫 인상을 상대에게 무의식적으로 긍정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는 엄청난 비밀 병기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부모는 우리를 보며 웃고 관심을 가져줬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내가 타인에게 존중받고 이해받는 사람이구나라는 안도의 기쁨이 잠재적으로 형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우리는 타인이 나에게 예의를 차려줄 때 안도하고 빗장을 슬며시 푼다.

그건 정말 사소한 것부터 시작한다. 조금은 더 밝은 인사, 조금은 더 웃는 모습, 조금은 더 친절한 말투로 타인을 대하는 게 사실은 자신에게 엄청나게 큰 이득으로 돌아온다. 예의는 결국 사람의 마음을 슬며시 말랑하게 주물러주고, 그 사소한 침투가 결국 엄청나게 큰 긍정과 행운을 끌어당긴다는 생각이 든다.

문동은이 평생을 건 복수를 포기하고 기적적으로 상대의 화해 기회를 주게 한 바로 그 포인트다. 그저 신발 벗고 방안으로 들어갔을 뿐인 '예의'있는 하도영 '덕분에' 그녀는 가해자에게 말도 안 되는 귀한 기회를 하사했다. 안타깝게도 가해자 박연진이 뻥 차버렸지만 말이다.

나 역시 살아가며 내가 지은 크고 작은 죄들이 어딘가에서 쌓여가고 둥지를 틀어가려 할 때, 내가 차린 '예의' 덕분에, 그 화의 불씨가 조금은 누그러지기를 희망한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타인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하기 뿐이다. 요즘은 청소 아주머니 덕분에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침 인사가 저절로 습득되어서 감사하다.

정말 인사와 웃음은 전염되는 것 같다. 이렇게 사소하지만 긍정을 이끄는 포인트를 만드는 매일의 일상이 쌓이다 보면 결국 거대한 행운이 한층 다가올 것을 느낀다. 인생은 이성적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 신기한 마법의 영역이 있으며,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예의의 영역이다.
#예의 #말 #더글로리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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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은 제주도에 사는 말수의사입니다. 사람보다 말을 더 사랑하는 이유를 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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