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친을 읍소하는 최명길.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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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명길 등 주화파들은 여전히 '위로는 종묘사직이, 아래로는 허다한 생명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차마 그러한 결단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협상론을 제기하였다.
이렇게 논의가 거듭되고 있을 때 1월 18일 청국 측은 사자를 보내어 '조선 국왕이 속히 성을 나와 항복을 하거나 아니면 19~20일 양일 간에 걸쳐 일전을 결하자'는 최후 통첩을 해 왔다.
이에 따라 왕명으로 최명길 등이 회군하는 청국 황제를 국왕이 성상(城上)에서 전송하는 예를 취하도록 하자는 내용의 국서를 쓰고 있을 때 예조판서 김상헌이 그 국서를 갈기갈기 찢어 내팽개친 다음 최명길에게 "그대의 선친은 도덕과 의리로 명망이 높은 분이셨는데, 그대는 어찌 이처럼 서슴없이 군부를 욕되게 하는가"라고 꾸짖었다.
최명길은 찢어진 국서를 주워 모아 풀로 붙이면서 "대감의 나라를 위하는 충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 역시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이다. 대감이 또 다시 국서를 찢으면 다시 붙이겠다"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국서가 청국 측에 보내지면서 김상헌은 사처로 나가 식음을 전폐하고, 다른 척화론자들도 이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척화론자들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명길 등이 청국 진영으로 가서 국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저들은 조선이 신하라고 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이때 참찬 한여직이 최명길에게 "구구한 명분에 얽매이지 말고 '신'(臣) 자 한 자를 더 써 넣어서 보내도록 하자"고 촉구하여, 다시 개서한 국서를 청국 측에 전달 하였다.
그러나 청국 측은 다시 인조의 출성(出城) 항복과 척화파의 압송을 요구하면서 국서의 접수와 회답을 거부하였다. 다시 조정에서는 이조참판 정온 등이 '칭신'하는 국서를 쓴 최명길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고, 청국 측은 인조의 출성항복과 척화파 압송 이외의 어떠한 화의 조건도 거부한다는 최후 통첩을 산성으로 보내왔다.
마침내 인조는 강화도의 함락으로 포로가 된 왕족과 신하들의 신변 걱정과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혹한에 시달리는 병사들의 사기를 지켜보면서 출성하여 청태종에게 항복할 것을 결심하였다. 식음을 전폐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던 김상헌 등이 청군 진영에 압송되어 갈 것을 자원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조는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척화파의 오달제, 윤집 등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국으로 압송되고 나중에 김상헌도 끌려갔다. 주전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주화론을 전개했던 최명길은 후일 다른 사건으로 역시 청국에 끌려가 같은 감옥에서 김상헌과 만나 서로의 애국심을 이해하면서 오해를 풀었다.
최명길은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이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할 때, 이를 주워 모으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 이를 두고 후세사가는 "결지자(結紙者)도 충(忠)이요 열지자(裂紙者)도 충"이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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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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