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금년 연초에 나는 미국 부모님께 조선 사진을 많이 보냈습니다. 훗날 조선회고록을 쓸 때 자료로 활용할 생각이었죠. 결국 조선회고록을 쓰지 못한 채 나는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지금 그 자료들이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 궁금하군요.
1886년 초에는 한양에서 이런 일들이 있었답니다.
우선 희소식으로서는 한양에 신임 공사가 임명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3월 8일 요코하마에 있는 친구가 보내온 전보를 통해 알았습니다. 공사로 임명된 사람은 뉴저지 출신의 Parker라고 하더군요. 그건 내 개인을 위해서 큰 낭보일 뿐 아니라 조선을 위해서도 아주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사실 그간 은근히 걱정했거든요. 혹 우리 미국 정부가 조선에 공사를 상주시키는 정책을 폐기하고 북경 주재 공사로 하야금 조선을 겸임케 하면 어떠나 하고요. 그렇게 되면, 미국은 조선을 경시한다는 시그널을 주는 주변국가들에게 주는 거니까요. 그만큼 조선의 주권은 외세에 위협을 받게 되겠지요. 특히 청나라와 일본은 옳다구나 하며 쾌재를 부르겠지요.
영국의 경우는 주중 공사가 조선을 관할하고 있었지요. 만일 미국도 그렇게 한다면 개인적으로 나는 난처해질 겁니다. 주중 공사가 지시하는 일을 뒤치닥거리나 하는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 테니까요.
나는 대리공사직에서 해방될 날을 목을 빼고 고대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신임 공사는 1월 26일 발령을 받았다 합니다. 두 달도 더 지났으니 곧 오겠지요. 헌데 공식적으로는 미국 정부로부터 아직 아무 이야기를 못 들었습니다. 신임 공사가 임명된 것은 아마 내가 지난 해 10월 미국 정부에 건의한 결과일 겁니다.
계속되는 번민
업무에서 일단 해방되면 나는 만사 제쳐 놓고 조선에 대한 구구절절 장문의 보고서를 해군부에 제출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그런 다음 나는 신상에 대하여 일도양단의 결정을 내릴 겁니다. 다시 해군 함정에 승선하여 그럭저럭 세월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공직을 떠나 새로운 길을 갈 것인가. 계속 번민이 되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고종은 여전히 나를 조정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했습니다. 국왕은 변함 없는 친구인 것 같았습니다. 이곳의 미국 동포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가 공사로 임명되어야 한다고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있었구요.
1884년 12월 갑신정변 시에 분실한 물건에 대하여 이제사 조선 정부가 현금으로 변제 처리를 해 주었습니다. 아무튼 그 돈으로 그 동안 졌던 많은 빚을 청산할 수 있었지요.
지난 3월 초에는 제물포의 U.S.S Palos호의 사관들이 나를 보러 한양에 왔습니다. 물론 그들을 공사관에서 묵게 했지요. 헤아려 보니 작년 한 해 동안에 최소한 24명의 해군사관과 5명의 민간인을 공사관에 들였더군요. 유숙 기간은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일주일에 이르렀지요.
이번 사관들 중에는 몇몇 반가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푸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몹시 많은 비용이 들어가고 애로가 수반되니 그게 고충이지요. 정부는 예산을 정기적으로 보내 주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관들은 동양의 생활을 전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다 돌봐야 하고, 통역 노릇도 해야 하고, 모든 것을 다 해야 했지요.
그 즈음 매우 불행한 일이 있었답니다. Taubles라는 미국인이 증기선 편으로 이곳에 나타났지요. 전임 푸트 공사의 대리인 격으로 사업을 추진하려 온 것이었습니다. 푸트는 그에게 한양의 중국인들과 친교를 맺고 공사관은 멀리하라고 분부했던 모양입니다.
샌프란시스코우 태생인 Taubles는 미국 동포들의 손길을 모두 거절하고 중국인들과 짝짜궁이 되었답니다. 그는 중국인들이 마련해 준 조선 가옥에서 유숙했지요. 이곳은 외국인이 지내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나는 인지상정상 그들을 도와주어야 겠다고 마음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는 아무 연락이 없었지만 나는 우선 그가 며칠간 지낼 수 있는 거처를 준비했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도움을 모두 거절하고 청나라 공사관의 도움을 받았답니다. 나이가 오십 정도인 그는 여태 한 번도 동양에 와 본 적이 없었답니다. 현지 사정을 아는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지내겠다니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지요.
급작스러운 천연두 증세
2월 15일 한양에 왔던 그는 3월 2일 그만 천연두에 걸리고 말았답니다. 설상가상으로 디프테리아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끝에 3월 15일 죽음을 맞았답니다.
죽기 전에 그에게 가까이 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직무상 그를 돌보지 않을 수 없었지요. 사람들을 구슬리고 뇌물을 주면서 그를 돌봐주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군요.
물론 나도 천연두가 무서웠지만 나몰라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를 찾아갔을 때 그가 죽은 지 반 시간이 지난 뒤였답니다. 용감한 의사 한 명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더군요. 집은 작은 가축 우리 같았는데 온통 어지러져 있었고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마당에는 더러운 진흙탕 물이 흐르는 또랑이 둘러 있었구요.
결국 의사의 입회 하에 사자의 소지품 목록을 작성하였지요. 그런 후 의사는 지쳐 빠진 모습으로 총총히 떠나버리고 나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시신과 함께 말입니다. 밤이 오고 있었고 주위는 황량하기 그지 없었지요. 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주변을 지키도록 하고 장소를 봉쇄한 뒤 그곳을 떠났답니다. 가슴이 몹시 아프더군요.
다음 날 나는 다시 그 집으로 갔답니다. 정말 어렵사리 중국인 한 명에게 부탁하여 관을 구하고 매장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 날 시신을 제물포로 보냈고 그 다음 날 그곳에 매장하였답니다. 유물은 내가 수습하였구요. 물론 천연두에 감염될까 봐 겁이 났지요. 며칠 지나도록 다행히 이상 징후는 없더군요. 정말 악몽같았습니다. 너무 지치고 심란하여 이곳을 버리고 멀리 도망가버리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소란과 긴장, 불안의 연속선상
3월 6일엔 또 상당히 긴장된 일이 일어났답니다. 관헌이 대원군의 하인 두 명을 압송해 가자 대원군이 격분하였지요. 대원군은 수하를 감옥에 보내 하인들을 석방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대원군 측 사람들이 포졸을 두들겨 패는 등 소란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제 무슨 사단이 일어나겠거니 하고 사람들은 불안해 했습니다. 나는 윈체스터 권총을 머리 맡에 두지는 않고 방 구석에 놓은 채 잠을 잤지요. 하수상한 세월이었지요.
"매일 이 사람 저 사람 조선인들에 저를 찾아와 조정에서 일해 달라고 청하는군요. 마치 제가 이곳에 오래 눌러 있기를 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세상에, 이렇게 골치 아픈 곳에 말입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저에게 감사해 하고 있다니 기쁘기도 하답니다." - 1886.3.29 편지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