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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파산신청서와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보이는 것들

종이 한 장에 요약되는 인생성적표, 무엇이 보일까?

등록 2023.12.19 14:59수정 2023.12.1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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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가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내 얼굴은 어떤 모습으로 타인에게 비쳐질까? 어느 한 시점의 얼굴처럼 종이 한 장에 누군가의 인생기록이 요약되기도 한다.

법원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문서(공적 장부)를 보면 곧 그 사람의 삶과 사회경제적 얼굴이 그려진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그 문서들은 한 사람의 인생경로와 재산에 관한 욕망의 기록들이다.

법원에서 등기관 업무를 하다보면 수많은 등기사항증명서(흔히 '등기부'라 불린다)와 그 안에 기록된 수많은 삶의 기록들을 보게 된다. 법인등기부를 보면 그 회사의 자산현황과 운영의 결과에 해당하는 자산증식과 분쟁의 소지까지 알 수 있다.

부동산등기부를 보면 그 소유자의 재산소유 현황과 재산관리 상황, 부동산에 관련된 분쟁과 갈등상황을 알 수 있다. 등기부는 갑구와 을구로 구성된다. 갑구에는 소유권과 이에 대한 제한 사항이 기록되고, 을구에는 제한물권이나 임차권 등과 그에 관한 제한 사항이 기록된다.

부동산등기부에 펼쳐진 소유와 욕망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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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등기소 모바일 홈페이지 대법원에서 운영 중인 인터넷등기소에서는 각종 등기를 신청하고 등기부를 발급 받을 수 있다. 등기부는 누구나 제한 없이 발급이 가능하다. ⓒ 배운기

 
여기 부동산을 소유한 A와 B의 등기부가 있다. A의 등기부 갑구에는 소유권 보존등기와 한두 번의 소유권이전등기를 한 기록만 있고, 을구에는 저당권설정이나 기타 담보등기 기록은 없다.

B의 등기부는 갑구에 소유권 보존등기, 이전등기, 가등기, 가압류와 압류, 가처분 등기 등 예상 가능한 등기신청 유형이 화려하게 구비되어 있다. 을구에는 근저당권설정등기부터 질권과 임차권, 지상권과 전세권 등기까지 백화점식 기록을 가지고 있다. 누구의 등기부가 더 바람직하고 누구의 인생여정이 더 담백할까?

정답은 두말할 것 없이 갑구만 존재하는 A의 등기기록이 가장 바람직하다. 흔히 말하는 은행을 통한 대출거래도 없고 자신의 부동산만 가진 경우다. 물론 이런 등기사항증명서의 소유자들은 은행잔고나 다른 자산이 든든할 때가 많다. 반면 갑구와 을구가 복잡한 B의 경우에는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나 갈등상황이 많고, 경제적 욕망의 흔적이 각종 민·형사소송으로 이어지며, 인간관계에도 말소등기, 변경(경정)등기와 같은 파탄의 흔적이 많을 것이다.


등기부의 기재사항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경우다. 첫째는 경매라는 집행과정과 민사 본안소송을 거치면서 발생한다. 간단한 예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으면서 설정한 근저당권 설정등기에 의해 은행이 임의경매를 신청하면서부터 드라마는 시작된다.

은행이 신청한 경매과정은 법원의 주도로 부동산을 타인에게 팔아치우는 환가절차를 거친다. 이때 경매과정이 완결되면 갑구의 소유권자가 변경됨은 물론 을구에 있는 각종 담보권 등 제한물권에 관한 기록이 말소 또는 변경되면서 치정에 얽힌 영화장면처럼 지저분하게 전개된다.

두 번째는 전후 소유권자들끼리 소유권에 관한 모종의 분쟁이 있을 경우 한쪽이 한쪽을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또는 이전등기를 행하라는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다. 이때는 보전처분으로 가처분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아 본안소송은 완행열차처럼 지지부진한 행로로 진행된다.

가처분등기 이후에도 얼마든지 다른 등기신청이 가능하므로 등기기록마다 다양한 색상으로 소유권과 기타 물권에 관한 등기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때도 본안소송의 승패에 따라 원고가 승소했을 경우에는 등기기록에 피바람이 분다. 가처분 등기 이후에 이루어진 거의 모든 등기기록은 말소될 운명에 처하고 권리라는 중력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구입하고자 하는 주택의 등기부를 살펴봤을 때 어떤 집의 등기기록에 더 끌리는지? 갑구에 소유권만 달랑 존재하고 을구가 존재하지 않는 등기부와 소유권에 기한 가처분과 가등기, 가압류(압류) 등기, 을구에 각종 금융권의 대출흔적 등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등기부 중 어떤 부동산에 더 매력을 느끼는지?

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스릴과 서스펜스를 즐기는 경우에는 복잡다단한 등기부도 쓸모 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런 기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 개인의 삶과 일상은 원고나 피고로 법원의 단골손님이 되어야 하며, 변호사업계와 법무사업계를 먹여 살릴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회생파산 신청서가 보여주는 경제적 삶의 성적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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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신청서 첨부서면 목록 파산신청서에는 채무자회생법이 요구하는 파산신청 조건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심사하기 위해 각종 첨부서면을 붙여야 한다. 이 문서들은 채무자 자신이 살아온 삶의 기록이자 증명서이다. ⓒ 배운기

 
회생법원에서 회생파산 업무는 주로 판사나 회생위원이 담당한다. 각종 회생파산 신청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신청인과 경제적 삶의 현황과 복잡다단한 여정이 보인다.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떻게 사회생활을 해왔으며, 현 경제상황이 어떠한지가 적나라하게 기재되어 있다.

기록을 살펴보면 경제적 파탄 상황에 있는 한 개인의 삶의 고비와 굴곡을 엿볼 수 있다. 신청서에 첨부해야할 서면에 가족관계나 개인 신분증명과 직업에 관한 사항, 채무 등의 부채증명, 현재의 직업과 수입 등 모든 상황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나는 누구이며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떻게 경제활동을 하였는지를 말해야 한다. 개인회생이나 파산신청서에는 자신이 현재 채무초과 사실과 자신의 직업에 관한 사항을 기재한다. 직업사항을 보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직업들이 망라된다. 그만큼 다양한 직업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연유로든지 경제적 파탄을 겪는다는 사실이다. 전문직이나 연예인이라 해서 예외는 없다. 오히려 잘 나가는 직업군의 파탄은 그 규모도 예사롭지 않다. 직업은 현재형과 과거형 시제가 공존한다.

신청인 개인의 개인정보부터 혼인여부나 가족관계 등이 첨부된다. 가족구성원의 수는 특히 회생신청에서 의미가 있다. 최저생계비를 산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파산의 경우에는 경제적 회생불능에 이르는 주요한 경력을 빠짐없이 기록해야하고, 지급불능의 시기와 사유를 진술해야 한다.

둘째는 누구로부터 빚을 얻고 현재의 상황이 얼마만큼 채무초과인지를 설명하고 증명해야 한다. 채무자인 신청인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현황과 현재의 생활상황을 기록한다. 현재의 재산목록을 상세하게 보여줘야 하며 거주상황에 대한 정보도 기재해야 한다. 자가 소유인지 임차인인지, 각종 세금 정보 근로소득에 관한 사실도 드러내야 한다.

채권자 목록을 통해 자신이 누구로부터 돈을 빌리고 어느 정도 변제금액이 남아있는지도 나타내야 하며, 이에 관한 부채증명서도 첨부해야 한다. 채권자는 신청시점을 기준으로 빠뜨리지 않고 기재하는 것이 타당하다. 만약 고의로 채권자를 누락하는 경우 법이 정하는 면책의 효력을 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어떤 사정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이 파탄이 되고 결국 회생파산제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을 기록해야 한다. 그 사정에는 실직과 영업파탄, 생계비용과 사업비용 등에 대한 설명을 적실하게 드러내야 한다.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채무초과 상황이 되었지만, 현재 경제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회생신청을 통해 일정액의 변제하고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게 바람직스러움을 말해야 한다. 반면 직업 활동과 미래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이들은 파산신청을 통해 채무를 탕감 받는 게 타당하다는 증명을 하여야 한다.

신청인이 제출한 서면은 평면적이고 객관적이지만, 개인의 고통은 입체적이며 주관적이다. 메말라 보이는 여러 서면(최근에는 재판사무시스템의 화면)을 보다보면 채무자의 인생궤적과 남다른 고통의 뿌리가 보인다. 물론 채권자들의 억울함과 쓰라림도 읽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타인의 경제적 실패를 검증하고 새출발을 가능케 하는 심사자들이 가져야하는 운명이자 멍에다.

넷째는 사건을 처리하는 담당자들의 고뇌도 엿볼 수 있다. 회생파산신청의 경우에는 법에 각하사유와 기각사유를 정하고 있어 어떤 사건이 중간에 중단될 수도 있다. 왜 어떤 사건은 중간에 중단했고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왜 어떤 사건은 지지부진하고 판단과 결정 과정이 어렵게 거칠 수밖에 없었는가를 살필 수 있다. 사건이 복잡하거나 규모가 크거나 채권자들의 수가 많을수록 담당자들의 부담과 결정의 어려움도 커진다.

'보통의 우리'가 기억해야할 삶의 기록은?

순간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사진을 찍는다. 사진은 수십 년 전의 내 모습과 가족들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 속에는 풀어낼 이야기와 잊히지 않는 웃음과 시간이 담겨있다. 비록 경제적 삶이 한 장의 종이에 담기는 것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기억하고 소망하고 싶은 사항을 기록하고픈 욕구는 있을 터이다. 누구에게나...

우리의 삶은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을 지켜내기 위한 애잔한 투쟁이다. 한 개인의 삶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부분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양자는 서로 교차하며 명암을 주고받는다. 개인의 삶속에서 양측의 형식과 실질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이렇게 공사 양면으로 나아가는 삶은 다양한 공적 사적 서면에 성취와 좌절의 기록을 남긴다. 공사다망(公私多忙)이라는 표현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누군가가 태어나면 가족관계등록부에 출생자로 신규 기록되고, 학생이 되면 학생생활기록부에 흔적이 남으며, 경제활동을 하게 되면 은행계좌와 직업이력이 만들어진다. 부동산을 구입하면 부동산등기부와 대장에 권리자로 기재되고, 분쟁과 갈등이 재판으로 치달으면 소송기록과 다른 공적장부에 남게 되며,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면 개인회생신청이나 파산면책 사건의 당사자로서 여러 공적기록에 남는다.

어떤 개인의 삶이 성공적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을까? 자신만의 만족과 사회적인 평가가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의 이유로 자신답게 살았는가?'에 대한 답이 중요하지 않을까.

누구나 소년등과(少年登科)와 유방백세(流芳百世)를 꿈꾸지만, 현실은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시민의 삶이 전부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소년등과한 이들이 오만과 독선으로 망치는 세상을 보았고, 유방백세가 아닌 유취만년(乳臭萬年)의 주인공이 되었던 이들을 봐온 경험이 있다. 지금도 그러하지 아니할까?

평범한 대부분의 삶은 채근담의 문장처럼 '낮은 곳에 거처한 뒤에야 높은 곳의 위태로움을 알고, 어두운 곳에 있은 뒤에야 밝은 곳을 향함이 지나치게 드러남'을 알게 된다. 수많은 삶의 굴곡에도 자신만의 멘탈과 리듬으로 극복하고 나아갔을 때 오롯이 나라는 존재로 기록될 것이다. 공적 사적 문서에 꽉 찬 존재가 아닌 동양화적 여백을 두었을 때 우리의 삶은 진정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수많은 이들의 삶의 기록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나의 이유로 나답게 살았는가, 살고 있는가? 내 인생성적표는?"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서울회생법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부동산등기부 #회생파산신청서 #인생기록 #인생성적표 #회생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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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교육원 교수를 거쳐 현장에서 밥벌이 중입니다. 부모와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꿈꾸고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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