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에게 날짜는 날짜 그 이상의 의미다. 일상과 다른 날들에 특별함을 부여하고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삶의 낙인 것이다.
조영지
시골집은 재밌는 구석이 많다. '오늘의집' 앱에 비할 데가 아니다. '세상에 이런 물건이' 같은 1980~1990년대 물건부터 최신형 제품까지 추상 전시를 방불케 하는 콘셉트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국희 아저씨의 집도 그랬다. 우선 가구들의 위치가 상당히 창의적이다. 소파가 거실 중앙에 있다. 우리는 당연히 그 소파에 앉지 않고 출입구 문에 기대어 나란히 앉는다. 소파 앞엔 둔탁하게 반짝이는 나무 탁자가 있다. 물론 우리는 그 탁자가 아닌 맨바닥에 과일과 차를 놓고 마신다.
소파엔 작업복이며, 앞치마며 하는 것들이 널브러져 있고, 나무 탁자엔 약 봉투가 가득 올려져 있다. 아저씨는 십여 년 전에 암 수술하셨다. 또 어디가 아프신 건 아닌 지 걱정이 됐다.
열린 안 방 틈 사이로 황갈색의 전기장판이 보였다. 그 위에 이불이 그대로 깔려있고, 묵직한 커튼도 닫힌 그대로다. 농사 일로 집안을 살필 여력이 없어 보였다. 이런 걸 부끄러워하지도, 특별히 흉으로 삼지도 않는 것이 시골의 남다른 미덕이다.
정겨움에 미소를 짓던 중 나는 달력 앞에서 눈길이 멈췄다. 시골의 스테디셀러, 바로 농협 벽 달력이다. 유난히 크고 흰 벽 달력. 맞다. 맨 아래 농협 심벌마크가 찍힌 바로 그 달력 말이다.
시골에서 이 달력 없는 집을 못 봤다. 그런데 걸려 있는 위치가 신기했다. 보통 달력은 안방 혹은 거실에 걸려있기 마련인데, 아저씨는 바깥으로 이어지는 벽 한 중간에 떡 하니 걸어두었던 것이다. 외부인도 마당에서 보면 훤히 보일 위치에 말이다.
보안과 안전에 예민한 도시인인 나는 '사생활이 너무 노출되는 거 아닐까?'라는 염려가 되었다. 달력엔 시력이 마이너스인 사람도 알 수 있을 만큼 큰 동그라미와 큰 글자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28일, 29일, 30일에 동그라미. 그 밑엔 아들네 가는 날. 이렇게 말이다. 공공연하게 집 비우는 날짜를 적어놔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허허, 영지야, 우리 저 날 아들네 간다. 이제 며칠 안 남았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행사 있다 카면 그날만 눈 빠지게 기다리는기라."
옆에서 아줌마는 "말라꼬(뭐 하러) 3일씩이나 있으라고 하는지 원"이라고 투덜대지만 은근 자랑이 담긴 목소리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아줌마, 아저씨의 얼굴엔 설렘의 빛으로 가득했다.
왜 달력을 밖에서 다 보이는 곳에 걸어 놓았냐고 물어보니 아저씨가 머쓱하게 답하셨다.
"그래야 자주, 많이 보지. 껄껄껄."
자식들 오는 날이 더 중요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