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희망'이 될 수 있는 2000원짜리 과일컵

[진료실에서 보내는 편지] 우리가 채소를 덜 먹는 이유

등록 2023.12.27 09:53수정 2023.12.2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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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숍은 약속 시간 전후로 시간을 보내기 좋은 장소다. 지인을 기다리던 중 지하철역 근처 커피숍에서, 평소처럼 아메리카노에 맛있는 케이크를 먹을 생각으로 메뉴를 훑어봤다.

"너무 늦은 시간에 카페인을 먹는 것이 좀 불편한데? 생크림이 듬뿍 들어간 카스테라를 먹을까?"

그러다 문득 시선이 과일컵에 멈췄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갔던 커피숍이었지만, 스스로 과일컵을 산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왜 과일컵에 선뜻 손이 안 갔을까? 2000원을 주고 산 컵 안을 봤더니 청사과 3쪽과 방울토마토 서너 알이 보인다. '가성비'가 매우 떨어진다고 생각이 들었다. 과일은 모름지기 박스째 사서, 식후 2~3개를 깎아서 쉴 새 없이 먹어야 제맛인데, 예쁘게 씻겨진 조각을 한입에 냠냠 먹는 것이 영 마뜩잖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일컵으로 손이 가는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 '방울토마토 1박스가 얼마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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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빈곤에 놓여있는 많은 노동자들. 더 여유롭고 평등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더 잘 챙겨먹을 수 있지 않을까. ⓒ UNSPLASH

 
1인가구, 시간빈곤과 식이섬유 섭취의 함수

과연 과일컵은 터무니없이 비싼 것일까?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어서 엄밀히 논하기는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일이 카페로 오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그 긴 시간 동안, 그 정도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건 과자나 캔음료보다는 어려울 것이다. 주변의 편의점을 잘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어느 편의점이나 과자나 캔음료는 비슷비슷한데, 신선식품의 구성은 다르다. 회전율이 빠른 곳에 신선식품이 많다. 과일컵이 양에 비해 비싼 이유도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유통 비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일컵에 손이 안 내밀어지는 것은, 꼭 커피숍의 과일컵이 비싸기 때문만은 아니다. 채소, 과일을 먹지 않는 젊은이, 특히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매년 약 1만 명의 표본을 추출해 전 국민의 영양과 건강을 조사하는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9년까지의 20대 약 87.5%가 식이섬유 부족군이다. 식이섬유 부족군을 나누는 기준은 과거에는 절대량으로 했는데, 이를 기준으로 보면 크게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1000kcal 당 14g 이하로 섭취하는 걸 식이섬유 부족군으로 분류하는 새로운 기준에 따르면, 20대와 30대에서 식이섬유 부족군의 비율이 크게 증가한다.

영양 섭취량 자체가 부족하지는 않다고 얘기할 수는 있지만, 전체 칼로리와 비교해서는 적게 먹는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하면 20대는 칼로리가 높은 고열량 식품을 많이 먹고, 상대적으로 식이섬유가 풍부한 저 열량 채소는 덜 먹는다는 것이다.

20대는 외식을 많이 한다. 외식이라 함은 집에서 밥을 해 먹지 않고 배달로 시켜 먹거나 혹은 식당에서 먹는 것을 말한다. 외식하면 정말로 영양학적 불균형이 심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샐러드 전문점에서 풍성한 샐러드와 채소가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지 않으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외식했을 경우 집에서 차려 먹는 것에 비해 나트륨의 함량이 높고, 채소와 양질의 단백질의 함량이 낮다. 대부분의 외식은 잘 팔리기 위해 대중적인 맛을 추구하기에 한편으 로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왜 외식을 많이 하게 될까? 외식은 시간과 돈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 게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든다는 것은, 직접 해보면 알게 된다. 이것저것 사서 1인분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이다. 계란말이 한 개를 구우려고 양파 1개, 당근 한 개를 송송 썰어서 거기에 맞는 계란물을 맞추다 보면 세상에! 계란말이 서너 장은 구워야 할 만큼 양이 불어난다. 그리고 요리책의 내용대로 하려면 당근 반 개, 양파 1/4개를 써야 하는데... 한 끼를 해 먹고 남은, 나머지 당근 반 개와 양파 3/4개는 냉장고 안에 기약 없이 '보관'되어 있다가, 어느 주말 물렁물렁해지고 곰팡이가 낀 상태로 발견된다. 1인 가구에서는 확실히 외식이 가성비가 좋다. 이전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은 20년 전보다 더 즉석 조리식품, 간편식을 자주 섭취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조리식품, 간편식은 섬유질이 적고, 지방, 나트륨, 고칼로리인 경향이 있다.

시간의 측면에서는 어떨까. 2019년 한국인의 무임금 노동(unpaid work)의 총량은 매일 1시간 40분이다. 이때의 무임금 노동은 흔히 말하는 집안일로서 식사 준비와 설거지, 빨래 청소, 집안 보수, 반려동물 케어 등을 모두 합한 시간이다. 만약 데워 먹는 수준의 요리가 아니라 정말 재료 준비부터 음식을 한다면, 1시간 40분은 순수하게 1끼 식사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다. 앞서 얘기한 국민건강 영양조사의 2013년부터 2019년까지 데이터를 조사해보니, 주 52시간을 초과해 일하는 사람들은 전체의 19.5%였다. 이들 중 47.2%는 1일에 1번 이상 외식을 했다. 근무시간이 길수록 매일 1번 이상 외식을 하는 비율이 높았으며, 이 비중은 20대, 그리고 60대 이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고 주 52시간을 초과해 일하는 사람들일수록 식이섬유 부족 위험이 1.27배 높았다.

식이섬유 부족군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식이섬유를 잘 먹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식이섬유는 암의 발생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식이섬유는 대변의 양을 증가시켜 대장 관련 질환, 특히 대장암을 예방할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최근에는 대장 관련 질환뿐 아니라 호르몬 조절과의 관련성 등도 많이 밝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식이섬유가 많이 함유된 식품은 혈당 지수가 낮아, 식이섬유가 풍부한 음식은 당뇨를 예방할 수 있다.

야근하는 사람들은 편의점에 가서 과일컵을 한번 사 보면 어떨까? 2000원을 주고 산 컵 안의 방울토마토 두어 개와 사과 두 쪽을 보면, 부모님이 깎아주시던 사과 한 접시가 생각나서 너무 아까울 수 있다. 그러나 집-회사-집-회사 하는 부족한 시간 중 도저히 요리할 엄두도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과일컵 한 개가 식이섬유 부족군으로 떨어지지 않을 최소한의 희망이 될 수 있다. 물론 집에서 느긋하게, 양상추와 로메인의 물기를 탈탈 털고 방울토마토와 오이를 요리할 수 있는 평등한 시간이, 모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도 당연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민지의 님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 한노보연 회원입니다. 이 기사는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12월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인가구시간빈곤 #식이섬유부족 #노동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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