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애지중지하는 선친의 작품
박병춘
"그때 아버지를 따라 목공예를 배웠어야 했는데, 철이 들어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 어릴 때 눈으로 보았던 것만 조금 기억에 있을 뿐 아버지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못 받은 걸 평생 참회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목공예 기술을 잇지 못하고 목공의 길에 들어섰지만 그래도 결국은 아버지의 피가 아닐까 하여 위안을 삼는다는 황씨의 말에 아내 김정윤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나의 스승
유년, 청소년 시절을 지냈던 서울 삼청동엔 황씨만의 놀이터가 있었다. 경비를 피해 창덕궁 담을 넘어 개방되지 않은 곳까지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궁궐 속의 숲과 나무랑 친했고 온갖 식물과 곤충을 만나며 교감했다.
목공도 종류가 여러 가지였지만 황씨는 차근차근 면 맞추기 기초과정부터 시작하여 고급 나무를 사용해서 유럽식 짜맞춤을 배웠다. 전통 방식 짜맞춤을 배우고 싶어 유능한 스승을 힘들게 찾아 배우고 익혔다. 그렇게 10년 가량 목공방을 찾아다니며 나무의 깊이를 이해하고 기술을 터득했다. 월급을 안 받을 때도 많았지만 책을 사서 독학하는 재미에도 빠졌다.
아내의 전공은 갤러리 큐레이터로 작가를 섭외하고 작품을 전시하여 작가와 관객이 만나 교류하고 소통하게 하는 일이었다. 아내는 자신이 하던 일을 접고 목공예에 빠져 들었다. 이 대목에서 아내 김씨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제 인생의 스승이자 목공예의 스승이에요. 제가 너무나 존경하는 자랑스러운 남편이랍니다. 나무와 함께 목공에 빠지다 보면 나무가 말을 해요.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고요.(함께 웃음)"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작품형 목공이냐 생계형 목공이냐, 부부는 예술과 현실사이에서 고민했다. 아내는 현실과 타협하기를 원했지만 남편은 여전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왜 퇴보의 길을 가냐며 수용하지 않았다. 남편은 점점 더 나무의 매력에 빠졌고, 상업적 목공을 외면했으나 차분하게 설득의 시간을 가진 끝에 생계를 위한 목공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