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 식탁위의 개>
민음사
이 좋은 소설을 어떻게 소개해야 누가 되지 않을까 고민한다. 늘 그렇듯, 마감에 쫓겨 글을 쓰고 있다. 좀 일찍 시작했어야 잘 소개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후회해도 소용없다. 게으른 나여, 최선을 다해 이 소설의 미덕에 대해 소개해 보기로 하자.
매주 서점 독자들에게 신간 소개 메일을 보낸다. 쟁쟁한 소설들 속에서도 이 <내 식탁 위의 개>를 소개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책을 많이 읽는 내게 있어서도 이 소설이 준 울림이 컸기 때문이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생태계의 일부로서 인간 종 본연의 삶을 살아가는 작가와 그의 남편 '그리그', 그들을 찾아온 학대당한 강아지 '예스'의 이야기쯤으로 말하면 될 것 같다.
자연으로 간 얘기 많지만, 이건 왜 다르냐면
소로의 <월든>을 필두로 해 숲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는 많았다. (결은 좀 다르지만 고도화된 서구 자본주의를 피해 인도 등으로 정신 수양을 하러 가는 이야기들도 있다.) 이 책이 다른 점은 작가가 잠시 떨어져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연에 들어가 그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실제 작가(클로디 윈징게르)는 25세였던 1960대 중반부터, 알자스 보주 산맥의 한 숲에 들어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소설화됐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거부하고~'로 소설을 설명했지만 좀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작가가 '저항의식'만으로 숲 속 생활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뭔가를 이루고 성취해야만 하는 삶에서 벗어나 진짜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애초 나는 그것을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고 칭한 것인데, 너무 도덕이나 당위의 차원이 되는 것 같으니 철회하겠다.)
'나'는 인간에게 학대당하고 떠돌아다니는 강아지 예스를 만난 뒤 이렇게 쓴다.
"우리는 평원을 떠나 양 떼와 함께 산간 지역에 정착했다. 그 후로 나는 꾸준히 붓꽃 다발이 갈라지듯 나 자신을 분열시키거나, 여러 모습으로 변화시키며 내 눈에 들어왔거나 나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이 되어 왔다. 그러는 사이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런 삶의 태도는 무언가를 건설하는 미국식 삶의 방식을 끊어 내기 위한 것이었을까? 부아비니(숲 지명)에 예스가 오고 나서 그것은 해체되었다. 결국 예스와 나는 그걸 잘게 찢어 버렸다. 갈기갈기 찢긴 조각들, 나는 그 조각들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내가 그 파편이 되었다. 내 삶이 독백으로 넘쳐나고 경계를 넘어서면서 불안정성과 불완전함, 일시적인 것들, 나이를 불문한 모든 것, 누더기와 조각들, 도약, 뛰어오름과 별난 것들이 각별한 의미를 띠었다. 일그러진 표정들. 시. 시란 대관절 무엇인가? 그것은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선 걸음이다."
그녀의 이런 삶이 가능했던 것은 유치원 시절 친구였다가 남편이 된 그리그-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오래된 고아원 동기 같은' 친밀감을 느끼는-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삶의 환희로 가득한 반려견 예스가 나타나면서, 화자는 '자연에 속한 광대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죽어가는 지구, 그 속의 인간
"현재 나는 책 읽는 걸 그만두었다. 대신 쉬지 않고 외부 세계를 살고 있다. 바깥세상을 책처럼 읽어 나간다. 끊임없이 바깥을 탐구하고 경험하는 가운데, 나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도 변화했다. 다시 말해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라고 덜 느낀다. 내게 연필 한 자루만 남을 임종 직전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게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이 우리 종(種) 안에 격리된 존재, 즉 다른 종들과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우리는 그들과 다르긴 하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가 인간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지극히 제한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그보다 훨씬 광대한 존재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종들이 멸종하고 종말로 치달아가는 이 세계를 인식하면서도 어떻게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사라져 가는 것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순간의 기쁨을 잘 붙잡으며 살아간다. 여든 넘은 작가이므로 노화와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는데도, 이 책은 삶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송가(頌歌)와도 같이 읽힌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대목들로 가득하다. 그 중 한 대목.
"나 혼자 일어난 아침에는 평소보다 집이 크게 느껴졌다. 집 전체를 나 혼자 차지한 셈이니까. 나는 집이 되어 버렸다. 내가 집을 채우고 있었다. 머리가 천장에 닿고, 눈은 창문이, 귀는 문이 되었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주변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다른 목소리들이 매복하고 나를 기다렸다.
다른 이들이 깨어 있을 땐 들리지 않던 모든 소리가 들려왔다. 사물들의 투박함, 찌꺼기와 재, 성냥 같은 사소한 것들의 절대적 더러움이 훨씬 잘 인지되었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며 내가 불을 지피는 것이, 질주하는 말처럼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는 것이 기뻤다. 그럴 때면 생각했다. 순종하듯 살지 말아야지."